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jamin Coffee Aug 12. 2016

공감각, 혹은 <스틸 플라워>

박석영, <스틸 플라워>, 2015

1.                    

<스틸 플라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담의 뒤, 옆, 그리고 가끔 앞을 좇는다. 달리 말해 <스틸 플라워>는 전적으로 ‘하담을 입체적을 다루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특히 도입부에서 하담을 둘러싼 어떠한 설명도 삼간다.


문득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 공주(천우희)를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 미지의 정보를 파편적으로 내던지는 <한공주>(이수진, 2013) 도입부의 불친절함은 <스틸 플라워>의 시작부터 솟아오르는 어떤 강렬한 데자뷰와 맞닿아있다.


그럼에도 <스틸 플라워>는 낯익은 듯 낯설다. 달리 말해 <한공주>와 <스틸 플라워>의 시작점에서 드러나는 결은 비슷한 듯 다르다. 비유컨대 <한공주>가 맞춰지지 않은 퍼즐이라면 <스틸 플라워>는 점 하나가 찍힌 흰 도화지랄까. 


<스틸 플라워>의 첫 시퀀스. 매우 짧은 쇼트들은 하담의 모습들을 기어코 이어 담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정보랄 것도 없다. 하담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어 보인다. 조각조각을 큰 그림을 맞춰 옮기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 퍼즐과는 달리 흰 도화지에서는 점 하나를 어디에 찍든 상관없으니까. 


우리가 첫 시퀀스에서 하담을 바라보는 것은 흰 도화지에 작은 점 하나가 찍히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하담은 어찌됐건 하필 거기서 캐리어에 짐을 넣고 바닷가로 향할 뿐이다. 그 쇼트들에서 해석의 여지란 ‘제로’다.

여기서 잠시 조금 다른 얘기.  


감독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하담을 그 속으로 집어넣었고, 반대로 하담은 영화 속에서 비로소 존재한다. 그러나 터미네이터나 E.T. 등 외계인과 하담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담은 애초에 이 지구에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데 있다. 현존재와 존재, 혹은 현상과 본질의 딜레마. 이를테면 이것은 영화, 더 나아가 허구의 자기모순이다.  


이렇게 이해해보자. 하담은 감독에 의해 비로소 영화 속으로 불려나와 존재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면 하담의 존재 자체를 추측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담이 영화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순간 그에게는 영화의 시간, 프레임을 벗어난 모든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는 도대체 왜 허겁지겁 짐을 싸고 바다를 마주하는가?’라는 우리의 첫 질문은 하담의 불가능한(영화 이전의) 시간에 가닿는다.


이런 식으로 하담의 존재를 에둘러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혹은, 수나 있었던) 것은 앞서 살폈던 <스틸 플라워> 도입부의 불친절함, 더 나아가 하담의 어떠한 정보도 삼갔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얘기들을 종합해보자.

다시 첫 시퀀스. 허겁지겁 짐을 싼 뒤 하담은 부둣가 아래 설치된 수면 높이의 철판 위에서 빙빙 돈다. 뭔가 결심한 듯 바다 쪽을 향해 망연히 걸어가다 멈춰 선다. 그 다음 씬. 하담은 다시 도심에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담의 그 무엇도 짐작할 수 없지만, 하담이 결코 외계인이 아니며(터미네이터나 E.T.와는 다르며) 그렇다고 하담이 영화의 시간 이전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즉 하담은 영화 속 세계의 내부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그가 황급히 바다를 향한다. 여기서 바다는 다른 세계(죽음, 혹은 외계)의 은유다. 


달리 말해 하담은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내쳐진다. 여기서 내쳐진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담은 한공주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담은 퍼즐이 아니라 도화지에 찍힌 점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것이 감독이든, 신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하담의 모든 행동은 구조적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다.


그 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세계의 끝까지 몰린 하담이 결국 다시 제 세계로 돌아오고 영화는 그제서야 스크린에 제목이 떠오른다.   

제목이 그렇듯, ‘강철 꽃’과도 같은 하담이 이 세계에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그렇게도 고군분투해야만 하는 까닭, 그리고 끝내 기죽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에너지의 뿌리 깊숙한 곳에는 바로 ‘외계인이 될 뻔한 내부인’으로서 그의 흔들리는 정체성이 있다. 



2. 

강렬한 잔상이 남아있는 세 장면. 끊어질 듯 이어지는 탭댄스. ‘창녀’라는 오해에 “일하고 싶어요.” 기묘하게 되돌아오는 대답, 그리고 그 아래 처절하기 울려 퍼지는 발소리. 마지막 쇼트에서 웃음과 울음을 알 수 없는 리듬으로 반복하는 하담(정하담)의 얼굴.            

                   

띄엄띄엄 이어지는 이 세 장면은 영화의 혼란스러운 서사를 강하게 떠받치며, 무엇보다 ‘외계인이 될 뻔한 내부인’으로서 하담의 불안정한 위치를 부연한다.

① ‘들은 대로 움직여봐. 그럼 들을 수 있을 거야.’


우선 탭댄스부터.


뭐 하나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 하담은 집(아닌 집)을 향하는 길에 우연히 탭댄스의 경쾌한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리다. 왜인지 모르게 하담은 탭댄스가 내는 ‘소리’에 빠져든다.


이후 고생 끝에 벌고 받아낸 돈을 쥐고 탭댄스 신발을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구입한 하담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탭댄스를 춘다.


여기서 질문. 왜 하필 탭댄스인가. 


탭댄스는 시각과 청각이 한 데 뒤섞이는 동시에 명확히 나뉘는 춤이다. 쉽게 말해 ‘탁타닥’하는 소리나 격렬한 몸동작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탭댄스라고 할 수 없지만, 눈을 감아도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는 춤으로는 탭댄스만한 것이 없다. 탭댄스는 시각‘만’으로도, 청각‘만’으로도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탭댄스는 탭‘음악’이 아니라 탭‘댄스’인가. 부당한 이름 짓기. 언제 누군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탭댄스라는 명명 뒤 몸동작과 소리 사이에는 뒤집어질 수 없는 위계가 생겨버렸다. “어제 탭댄스를 들었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으며,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멍청한 놈’ 취급 받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탭댄스를 ‘들은’ 사람을 멍청한 ‘아웃사이더’ 취급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하담이 증명해보이고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 하담은 탭‘댄스’를 청각으로 처음 지각한다. 달리 말해 하담은 정말 ‘어제 탭댄스를 들었다.’ 하담은 탭댄스의 소리를 듣고 어렵게 모은 돈을 내고 탭댄스 신발을 사온다. 


그러나 하담은 결코 뚱딴지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하담은 ‘멍청하게’ 탭댄스를 들었을 수도 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라. 결국 하담은 탭댄스를 추고 있지 않은가. 소리를 좇아서. 눈을 감고 소리를 좇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하담만의 탭댄스가 꽃피어오른다.


탭댄스에서라면 그게 춤이든 음악이든 상관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 끌리는 것을 좇아라. 소리를 좇다 보면 몸이 움직일 것이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소리가 들릴 것이다. 더 나아가 소리를 좇다 보면 몸이 움직여 당신을 사로잡았던 그 소리를 다시 들을 것이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소리가 들려 당신을 황홀하게 했던 그 몸동작을 스스로 펼쳐 보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탭댄스를 추는 하담에게 말한다. 소리를 좇아 움직이면 그만이야. 탭댄스에서라면 오답이란 없어. 모든 것은 정답으로 통하니까.      

② 탭댄스로 하나 되는 ‘댄스=몸부림’ 


그러나 동시에 탭댄스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하담에게 잠시나마 희망의 어렴풋한 끈을 건넸던 감독은 어김없이 그를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이 지점에 한해서 이동진의 <스틸 플라워> 한줄평 '희망과 생명을 담기 위해선 부득불 가혹한 수난을 안겨야 할까'는 정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담의 '우는 모습'만 바라봤다는 점에서 해당 평은 반쪽짜리에 그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하담은 분명히 웃으며운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  하담이 겨우 구한 일자리에 찾아와 그녀를 심하게 폭행하는 여자(최문수). 왜 하필 그때 너는 탭댄스 신발을 신고 있었던가.


'탁타닥 탁타닥’. 조금은 이상한 탭댄스 소리. 뺨을 맞고, 밀쳐지고, 옷을 잡혀 끌려나가면서 그녀는 탭댄스를 들려준다. ‘탁타닥 탁타닥’. 눈을 감으면 영락없는 탭댄스. 하담은 절망과 절규의 몸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탭댄스의 소리를 들었을까. 


댄스와 몸부림이 뒤섞인 탭댄스를 들으며 그는 무엇을 원망했을까.

③ 웃으며운다.


이제 마지막 씬.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어쩌면 시작. 행복했던 바로 그 시작점부터. 정답은 없고 들리는 대로 움직이고 움직이는 대로 들으면 된다는, 그 지극히 사소한 희망에서부터 모든 게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격렬한 파도에 처절하게 맞서며 탭댄스를 추는 하담과 


그 끝에서 마주한 마지막 쇼트.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뒤섞인 세계, 웃으며운다.


* 잘 읽으셨다면 이곳을 눌러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억압, 혹은 <이웃집에 신이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