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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jamin Coffee Oct 14. 2016

정상성, 혹은 <내추럴 디스오더>

크리스티안 쇤더비 옙센, <내추럴 디스오더>, 2015

<내추럴 디스오더>는 불도저같다. 뚜렷한 의도를 견지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간다. ‘정상이란 무엇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등 정상성을 둘러싼 질문들이 영화 곳곳에서 은연중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너무 고리타분한 게 아닌가. 문학·영화·미술·음악 등 비스무리한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은 이미 곳곳에 너무 많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내추럴 디스오더>에는 ‘이 영화가 아니면 성취해내지 못했을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추럴 디스오더>가 이토록 빛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응시-시선’의 뫼비우스띠적 구조와 야코브 노셀의 ‘非시선(시선의 불가능성)’ 속에서 드러나는 중층성 덕이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이런 ‘상찬’에 감독 크리스티안 쇤더비 옙센이 끼어들 지점은 거의 없다는 말도 된다. 그의 개입은 오히려 영화의 가치를 끌어내릴 뿐이다. 



1. 영화의 중층성 - 옙센과 야코브의 시선교환, 혹은 뫼비우스띠 


본격적인 영화 얘기를 하기에 앞서 기존 작품들이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해온 방법을 떠올려보자. 


어떤 장르, 플롯, 발화방식을 취하든 대다수의 작품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리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테면 "응, 다변증, 쓸데없이 잔소리 많은 것두 다아 정신병이라우"라는 자기인식을 통해 ‘도대체 누가 정신병자인가’를 묻는 구보씨(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그런데 이런 방법론에는 ‘시선/발화의 비대칭성’쯤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결정적 한계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응, 그래. 나도 사실 비정상이야”라고 말하는 ‘정상인’의 발화행위는 정상-비정상의 경계를 뚫고 지나가는가. 다만 경계의 두터운 벽 앞에서 무기력하게 되돌아와 그저 메아리로 사그라질 뿐인 건 아닌가.  


그러니까 정상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정상인의 시선으로 비정상인과 그 경계를 응시하려는 시도는 자칫 성공한 듯 보일 순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성의 영역 안에서 꿈꾸는 ‘환상’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단 한 번도 정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딜레마는 앞서 모든 작품들의 시도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기력한 계보 와중에 <내추럴 디스오더>에서 드러나는 정상성의 시선, 즉 카메라는 어떠한가. 


<내추럴 디스오더>의 카메라는 감독의 시선으로서 ‘비정상’ 야코브와 수많은 ‘정상’들을 담는다. 그러나 여기서 야코브는 단순히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영화는 비정상, 즉 야코브의 시선을 끈질기게 좇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야코브라는 피사체를 일방적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주체로서 야코브의 시선을 응시한다. 


여기에 정상으로서 감독,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을 응시하는 야코브의 응시까지 더하면 이 둘의 미묘한 눈맞춤은 더 복잡한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곧, 말하자면 응시와 시선의 기묘한 운동에까지 이른다. 


야코브의 시선을 응시하는 카메라와, 카메라의 시선을 응시하는 야코브. 달리 말해, 정상을 바라보는 비정상을 바라보는 정상과, 비정상을 바라보는 정상을 바라보는 비정상. 


<내추럴 디스오더>는 비유컨대 이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앞이 곧 뒤고, 뒤가 곧 앞인 이런 ‘뫼비우스띠’적 자장 속에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라면 ‘나의 응시’와 ‘너의 응시’는 하나로 뒤섞이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구분도 사라지고 나라는 주체와 너라는 객체는 곧 나라는 객체와 너라는 주체가 된다. 


이는 ‘주체와 객체의 혼종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한데, 이런 뒤섞임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 또한 그 고유의 영역을 상실하게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정리하면 <내추럴 디스오더>는 기본적으로 그 밑바탕에서 야코브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이를 객체화하는 구조적 틀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 주체와 객체, 즉 이분법적 틀을 해체하고 있다. 



2. 양방통행길에서 일방통행하는 카메라 - 옙센의 시선


이제부터는 앞서 살핀, 영화의 밑바탕 위에서 감독이 영화에 개입하는 지점을 살펴보겠다. 


사실상 옙센의 손을 거쳐 탄생한 ‘완성작’으로서 <내추럴 디스오더>는 여러모로 전형적이다. 편집방식뿐만 아니라 기-승-전-결의 무난한 전개방식, 그리고 영화가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지점(연극)의 포맷을 영화 전반에 덧씌우는 방식 등.


특히 옙센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리키고 무너뜨리려는 과정에서 앞선 작품들이 취했던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우를 범한다. 야코브의 불편해보이는 걸음, 움직임 등을 담은 컷과 ‘정상인’들의 버퍼링 걸린 듯한 움직임을 접합하는 구성도 그렇고 야코브가 직접 사람들에게 ‘정상성’을 묻거나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추럴 디스오더>가 이런 방식으로 정상성을 얘기하는 것은 앞선 작품들과는 다른, 보다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것은 폭력이며, 특히 비정상이라는 모호한 집단이 아니라 야코브라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앞서 살폈든 영화는 옙센과 야코브의 ‘주체=객체’라는 기묘한 시선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비유컨대 옙센과 야코브의 시선과 응시는 양방통행을 하고 있다. 단지 주체로서 정상이 목적지로서 비정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정상이 대상이자 또한 주체로서 비정상을 향하(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옙센이 영화에 개입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일방통행적이다. 그는 정상인의 시선으로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획을 응시, 끊어내려고 고군분투하지만 돌아오는 거라고는 메아리, 정상성의 재확인뿐이다. 


여기서 <내추럴 디스오더>의 이런 방향성이 앞선 작품들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은, 이는 자칫 야코브를 기만하는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방통행길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차가 마주한 상황을 떠올려보자. 반대방향으로 가는 당신의 차량은 일방통행길 자체를 욕할지언정 당신 앞에서 크락션을 울려대는 상대를 비난하진 못할 것이다. 당신은 후진을 하며 당신이 물러설 수밖에 없게 만든 ‘일방통행길’을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양방통행길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차가 마주쳤고 거기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엑셀을 누르며 자신을 위협한다고 상상해보자. 무엇보다 당신이 소수자, 즉 비정상이라면. 정상의 불합리한 폭력 앞에서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릎 꿇고 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비정상성과 무기력을 절감하는 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바탕 위에서 옙센이 가하는 ‘정상성의 일방향적 시선’은 그대로 야콥에겐 다만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비정상성을 절감하는 폭력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내추럴 디스오더>은 감독이 개입함으로써 앞서 영화 스스로 형식적으로 성취했던 요소들을 오히려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셈이다.



3. 통행금지 - 야코브의 非시선이 응시하(지 못하)는 공간


또한 이처럼 정상-비정상의 경계를 향하는 옙센의 시선이 폭력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반대 지점, 그러니까 비정상-정상의 경계를 바라보는 야코브의 시선(비정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이 부재하고, 더 나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옙센, 혹은 <내추럴 디스오더>의 윤리적 둔감성, 혹은 엉성함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 차라리 문제는 구조적이고 계층적이며, 달리 말해 이 영화는 애초에 그 출발점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하위계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재현의 구조적 폭력성을 치밀하게 파고든 스피박의 말을 전유해 “야코브는 자기의 눈으로 정상성을 응시할 수 있는가” 혹은 “야코브가 응시하는 정상성을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 재현해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 그 앞에서 비정상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야코브는 이러한 시선의 불가능성 앞에서 눈을 감고 철저히 안으로 안을 침잠한다. 그는 정상성을 향하는 대신 감긴 눈으로 비정상을 응시 (못) 한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이 뚜렷이 감각할 수 있는 내면에 천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행금지의 세계 위에 멈춰선 채 주위를 관조하는 야코브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정말로 정상성은 허상에 불과하며 비정상과 정상은 한 끗 차이일 뿐인가. 비정상은 굳이 존재해야 하는가. 나는 태어났어야 하는가. 나는 행복한가, 아니 굳이 행복해야할 필요가 있는가. ‘비정상’을 거부하는 것은 다만 내가 비정상이기 때문은 아닌가. 달리 말해 나의 모든 존재근거는 비정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야코브는 이 수많은 질문 중에 단 하나에도, 정말로 단 하나에도 그럴듯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그건 말하자면 이 질문들은 모두 비정상이 발화하(지 못하)는 (非)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는 반대로, 야코브가 이 모든 질문에 그 누구보다도 충실히 답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침묵으로, 주저함으로, 그리고 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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