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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Apr 18. 2019

도쿄의 작은 쉼표, 아타고 신사

'장사의 승마술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도다!'

도쿄, 2018년 11월

네번째 이야기

도쿄도 미나토구 아타고





도쿄의 최고봉, 아타고야마(愛宕山)


 옆방 미닫이문 소리로 아침을 시작하는, 캡슐호텔 ‘퍼스트캐빈 아타고야마’. 그 주변에는 마치 각 방위를 지키는 뭐라도 되는 것처럼 4개의 역이 들어서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교통의 요지처럼 들리겠지만, 이 역들은 모두 걸어서 10분은 걸린다. ‘아침에 나갈 땐 산책 기분이지만, 밤에 들어올 땐 행군 기분인 호텔의 이름은?’ 하는 수수께끼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아침이었으므로, 츠키지 시장의 초밥 생각에 사뿐사뿐 카미야마쵸역으로 향했는데……. 뜻밖의 붉은 토리이(鳥居)를 만났다.



아타고야마 밑의 토리이. 
토리이란 신사의 입구에 세운 기둥문으로, 신의 영역과 속세의 경계를 상징한다.



 왜 숙소의 지점명이 ‘아타고야마’인지 이 순간 깨달았다. 바로 이곳 아타고야마 ― 아타고산의 곁에 숙소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아타고야마는 아타고 신사가 있는 정상까지 표고 26미터가 채 안 되는 언덕이지만, 그럼에도 도쿄 23구 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때문에 에도시대에는 아타고야마의 정상에서 에도 시가와 도쿄만 너머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다는데, 그 경치가 아름다워 에도 팔경의 하나로 꼽을 정도의 명소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케이사이 에이센(渓斎英泉),《에도팔경 아타고야마의 가을 달》(江戸八景 愛宕山の秋の月), 19세기 초.
도쿄만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아타고야마의 정상에서 구경꾼들을 상대로 찻집이 성업하는 모양.
(사진출처 : tokyo-bay.biz)


 에도팔경 운운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 만약 이곳에 토리이만 덩그러니 서있었더라면 ‘어, 신사네’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절벽과도 같이 가파른 계단 밑에 놓인 입간판이, ‘출세의 돌계단(出世の石段)’이라 커다랗게 적어놓은 입간판이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아타고 신사로 올라가는 이 계단에는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얽혀있으니…….



'장사의 승마술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도다!'


때는 바야흐로 관영11년(寬永11, 1634년).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수행하는 신하들과 함께 조죠지(増上寺)라는 절을 참배하고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은은히 풍기는 꽃향기.
이에미츠 공이 무심코 말을 멈춰 세우고 산 위를 올려다보니,
산중턱에서 정상까지 흐드러지게 핀 매화, 매화!

이에미츠 공 말하기를

“오오, 대단하기 그지없구나! 참으로 잘 피었어!
여봐라, 누구든 정상에 올라 매화 가지를 꺾어 오거라.”

이에 재빠른 가신 하나가 나서

“예! 분부대로 속히 대령하겠나이다.”

라고 답하고 말에서 내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려는데
이에미츠 공이 이를 제지하는 것이 아닌가?

“기다려라! 말을 타고 오르라 이 말이다.”

“예? 예?!”

당황한 가신은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대답인지 되묻는 건지 애매모호한 ‘예’만 거듭하는데.
그도 그럴만한 것이 말을 타고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가는
정상에도 오르기 전에 삼도천을 건널 게 빤하나니.

“들리지 않는 게냐?
누구든 좋으니 말을 타고 이 돌계단을 올라
매화를 꺾어오란 말이다!”

이에미츠 공의 호통에 가신들은 하나같이
행여 쇼군과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우물쭈물 우물쭈물 고개를 박고 땅만 바라볼 뿐.
이와 같은 가신들의 모습을 본 이에미츠 공, 더욱 분기탱천하여

“고작 이 정도 언덕을 못 오른단 말인가!
도쿠가와 가문이 삼대 만에 이 꼴이 났단 말인가!
못난 놈들…… 다 관둬라!
이 몸이 직접 올라가 보이겠다!”

“아니 됩니다, 주군! 위험합니다!”

가신들은 주군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할까
차마 이에미츠 공을 멈춰 세우지 못하는데.
이에미츠 공, 호기롭게 돌계단 밑까지 말을 몰아 나아갔으나,
정상을 올려다보고는 멈춰서고 만다.
멀리서 봤을 때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계단이
벽이 되어 이에미츠 공을 가로막고 서있었던 것.

행여 주군이 다칠까 보다 못한 가신들은
수하에서 세 명을 뽑아 계단 위로 올려 보내는데,
하나같이 겁을 먹은 말들이 발을 헛디뎌
콰당탕탕탕 큰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지니,
사람이고 말이고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

이쯤에 와서는 말을 꺼낸 이에미츠 공도 아연실색할 따름이었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아즈마노하나 우키요 코단, 마가키 헤이쿠로》 (東錦浮世稿談 曲木平九郎), 1867.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매화 가지를 헌상하기 위해 
오토코자카(男坂, 출세의 돌계단의 다른 이름)를 오르는 마가키 헤이쿠로.
막부의 명이라면 태산도 대수롭지 않도다. 장사의 승마술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구나.
(사진출처 : www.mfa.org)



이때, 수행 행렬의 말석에 있던 한 무사
묵묵히 말을 몰고 나와,
신묘한 승마술로 가파른 경사를 척척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이에미츠 공 무사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가신들 중 누구도
그 무사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한편, 무사는 한손에 매화 가지를 꺾어들고 유유히 산을 내려오는데,
그가 헌상한 매화를 받아든 이에미츠 공이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사누키 마루가메 번(讃岐丸亀藩)의 가신,
마가키 헤이쿠로(曲木平九郎)라 하나이다.”

“이 태평성대에 승마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다니 참으로 훌륭하다.
일본 제일의 승마 명인이로구나.”

하고 이에미츠 공이 그를 치하하였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마가키 헤이쿠로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


 이처럼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여 성공을 거둔 마가키 헤이쿠로의 일화가 얽혀있다 하여 이 계단을 ‘출세의 돌계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관영삼마술(寛永三馬術)’이라 불리는 이 이야기는 강담(講談, 대중 앞에서 상업적으로 옛이야기를 해주는 일) 등 전통 공연의 단골 소재가 되어 유행했다고 한다. 헤이쿠로 이야기의 유행은 민중들의 출세와 성공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 ‘관영삼마술’은 ‘무단정치’를 하였다 이야기될 정도로 막부의 권력 강화에 애썼던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성격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출세의 계단 좌우의 사자상. 미묘하게 다르게 생긴 까닭에 더욱 재밌다.


 딱히 출세를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여행자도 마가키 헤이쿠로의 이야기에 이끌려 출세의 돌계단을 올라보았다. 총 86개의 계단. 과연 경사가 너무 급해서 60단쯤부터 숨이 차기 시작하더라.  계단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이를 말로 오르내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하지 못할 일.




히로시게 2대(広重) · 토요쿠니 3대(豊国), 
《에도의 자랑 36흥, 아타고야마 비사문천왕의 사자》(江戸自慢三十六興 愛宕山毘沙門ノ使), 1864.
하늘에서 비사문천왕의 사자가 출세의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 
원래 아타고 신사와 함께 있던 절 엔푸쿠지(円福寺)의 정월 3일 축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출세의 계단 윗쪽을 구름으로 가려, 마치 하늘에 맞닿은 것처럼 묘사했다.
(사진출처 : tokyo-bay.biz)



도쿄의 작은 쉼표, 아타고 신사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수고에 대한 보답처럼, 그곳엔 아름다운 신사가 있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대한 힘보다는 세심한 곳까지 마음을 쓰고 손을 움직여 이루어낸 아름다움이, 어쩐지 이야기 속의 헤이쿠로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푸르름과, 그 안에 조화롭게 어울려 푸르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신사의 풍광이 산책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사실 아타고야마와 아타고 신사는 도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토의 아타고야마와 아타고 신사가 본디의 것인데, 교토의 아타고야마에서 시작된 산악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일본 방방곡곡에 같은 이름의 산과 신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도쿄―에도의 아타고 신사는 전국을 제패하고 에도에 터를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1603년에 지어졌다. 아타고 신사의 주된 신은 군신(軍神)인 쇼군지장(勝軍地藏)과 불의 신인 호무스비노미코토(火産霊命)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불의 신 호무스비의 힘을 빌어 이제부터 번영하게 될 에도의 화재를 막고자 하였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목조건축이 주를 이루는 일본에서 도시화재는 신의 힘을 빌어야 할 정도로 끔찍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본전 앞의 쇼군우메(장군매화).
마가키 헤이쿠로가 이 나무의 가지를 꺾어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헌상하였다고 전해진다.


본전 앞의 마네키이시(부르는 돌). 
앞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옆에서 보니 꼭 마네키네코처럼 손을 내밀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 돌을 쓰다듬으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잉어가 사는 연못. 아타고 신사는 정원으로서도 일품이다. 황동색 토리이가 고와서 찍어보았다.


아타고 신사의 하고이타(羽子板). 
하네츠키(羽根突き)―깃털이 달린 공을 주고받는 놀이에 쓰이는 라켓을 하고이타라고 한다. 
하고이타에는 마를 쫓고 행복을 부른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정월에 여성들에게 하고이타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에도시대에 아타고 신사의 하고이타는 아주 유명하여,
정월 아타고 신사에 하고이타를 파는 장이 서면, 늘어선 행렬이 니혼바시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사 구경을 마친 여행자는 아타고야마를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생각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러하듯. 숙소가 역에서 좀 떨어져있으면 어떠한가. 덕분에 이렇게 또 샛길로도 걸어보고, 무수한 이야기들과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가는 것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매화가 피는 계절에 다시 한 번 아타고야마를 찾아야겠다.



P. S. 마가키 헤이쿠로 이후에도 말을 타고 출세의 계단을 오른 사람이 세 사람 있다. 가장 최근에는 1982년 승마 스턴트맨 와타나베 타카마(渡辺隆馬)가 니혼테레비(日本テレビ)의 특별방송에서 마가키 헤이쿠로를 재현해보였다.






P. P. S. 산을 내려올 때, 출세의 계단으로 내려오면 복이 달아난다고 한다. 그 옆의 경사가 완만한 온나자카(女坂)로 내려와야 한다고.


P. P. P. S. 아타고 신사 홈페이지(http://www.atago-jinja.com/)에서 오미쿠지를 뽑아볼 수 있다. 21세기의 신령은 랜선을 타고 강림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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