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기축구 이야기
“윤경아, 형 따라 주말 조기 축구회 나갈래?”
리버풀에 죽고 못사는 Y형님이 귀가 쫑긋 해 지는 제안을 했다. 최근 ‘마라클 모닝’ 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꼭 축구가 아니더라도 조금 더 보람찬 아침을 보내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Y형님의 제안은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만약 주말마다 조기축구회에 나간다면 불금이라는 핑계로 금요일 마다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후회를 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 축구를 하러 가야 된다는 자신과의 약속으로 인하여 전날 컨디션을 관리하고 핸드폰으로 아침 알람을 맞추어 두고 일찍 잠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부터 지켜진다면 이 얼마나 큰 성과인가? 그리고 주말을 새벽운동으로 시작한다면 하루가 무척 보람찰 것이고 건강관리까지 할 수 있으니 이건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 것은 바로 내가 축구를 너무 못한다는 것이다. 조기 축구라 함은 축구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실력을 뽐내는 자리라 생각되는데 축구를 글로 배운 내가 가서 피해를 끼치면 어쩌나? 회사 동료들이나 친한 친구들이야 나의 헛발질을 그냥 웃으면서 넘어 간다고 하더라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 민망함과 쪽팔림은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형님,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그런데 저 가서 축구 못한다고 망신당하면 어떻게 해요?”
“걱정 하지마라. 다들 너만큼 차더라.”
다들 나만큼 찬 단다. 즉, 다들 축구를 엄청 못한다는 뜻이다. 화려한 축구 보다는 주말 아침에 모여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의의가 있는 아주 부담 없는 모임이라고 한다. 이건 정말 나에게 딱 맞는 모임이었다.
“여보, 나 주말 아침 마다 조기 축구회를 가기로 했어.”
“11시 까진 들어와.”
아내는 아무 말없이 허락을 해 주었다. 아내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오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아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쉽지가 않다. 다만 주말 아침에는 항상 10시까지 취침을 해야 하는 아내이기 때문에 새벽 약속은 큰 무리 없이 허락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과 골프 약속도 항상 새벽에만 잡는다.
아내의 허락까지 받고 나니 설레기 시작했다 주말 아침에 축구와 함께 땀을 흘리고 집에 와서 시원하게 샤워를 한 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건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축구를 잘 못해서 피해는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도 다 똑같습니다. 하하.”
좋은 분들이다. 모두들 반갑게 맞이해 주니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40대 형님들이어서 오히려 부담이 없었다. 어린 동생들 앞에서 나의 헛발질을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민망한 일이지만 인자해 보이시는 형님들이야 충분히 이해를 해 주실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5명씩 팀을 이루어 공을 찼다. 나의 축구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가? 아니면 신규 멤버에 대한 예의 인 것일까? 다들 나에게만 공을 패스하는 기분이었다. 아, 안그러셔도 되는데… 수없이 공을 놓치고 알을 까며 저 하늘 높이 똥볼을 차도 그 누구 하나 뭐하고 놀리지 않고 끊임없이 패스가 이어졌다.
“생각보다 잘 하시는데요?”
어쩌면 저렇게 웃으면서 빈말을 잘 하실까? 정말 예의가 바른 분들이었다. 처음의 긴장감은 완전히 없어 지고 즐겁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손흥민으로 빙의되어 폭풍 드리블도 해보고 호날두의 무회전 슛까지 날리며 조기축구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버렸다.
“지금 몇 대 몇이지?”
“몰라요. 그냥 골든골 하시죠.”
승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아침에 모여서 다같이 축구를 즐기고 활기찬 주말을 맞이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모임이 분명했다. 아침 6시에 시작된 축구는 8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나고 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보통의 주말이었다면 전날 음주의 여파로 집에서 숙취에 시달리고 있어야 할 시간에 두시간이 넘도록 뛰었으니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자 그럼 다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새벽부터 뛰었더니 정말 배가 고팠다. 이렇게 운동을 하고 먹는 아침은 얼마나 꿀맛일까. 우리는 근처 국밥집으로 향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를 맞아 주시는 식당 아주머니를 보니 이 곳은 주말마다 축구를 마치고 들리는 정해진 코스가 분명했다.
“이모, 국밥 열 그릇이랑 소주 두 병이요.”
소주?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그 소주가 분명했다. 지금 시간은 아침 8시 50분. 이 시간에 소주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아. 소주는 안드셔도 됩니다. 그냥 먹고 싶은 사람들만 딱 한잔 씩 하는거예요.”
초면에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소주 주문에 살짝 당황한 나의 표정을 읽은 것인 것인지 앞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하신 형님께서 소주는 필수가 아닌 옵션이라고 알려 주셨다. 무엇이든 풀옵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도 딱 한 잔만 하시죠 뭐. 하하“
그렇게 소주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방금까지 후들거리던 나의 다리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솟아올랐고 축 쳐져 있던 나의 몸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역시 아침에 먹는 소주의 힘은 위대했다. 이대로 한게임 더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 술 잘드시나 봐요?”
“그냥 조금 즐깁니다.”
그렇게 축구로 만난 우리는 소주로 하나가 되었다. 주문했던 국밥이 나오기 전에 이미 네 병의 소주가 비워졌고 국밥을 다 먹고 난 뒤 1인 1병을 완성하였다. 역시 땀 흘리고 먹는 밥 맛은 정말 꿀맛이구나.
“자 수고 많았습니다. 집에 가실 분들은 가시고 커피 한잔하실 분들은 카페로 가시죠.”
“좋지요.”
소주를 많이 마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 냄새를 풍기면서 집으로 갈 순 없었다. 고작 소주 한 병 먹고 집에 가서 실수를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커피를 한잔 마시며 술기운을 없애고 귀가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 주문하시죠.”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전 호가동이요.
“생맥주요”
맥주? 누군가 맥주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문내역을 보니 커피보다 맥주가 대세였다. 이 곳은 맥주도 파는 카페인가? 커피도 파는 호프집인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빠른 주문이 필요해 보여 고민할 것도 없이 대세에 따라 나도 맥주를 시켰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2차 자리가 완성되었다. 더운 여름날 새벽에 땀 흘리며 운동을 한 뒤 배불리 밥을 먹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먹는 맥주의 맛은 그야 말고 일품이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2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11시가 넘어 가고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아내가 11시 까지는 꼭 들어오라고 했는데. 어쩌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자 아내로부터 톡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오빠, 나 친구들이랑 백화점 좀 다녀올게. 집에 오면 밥 차려 놨으니까 데워 먹어.”
만세! 11시까지 꼭 들어오라고 해놓고 백화점으로 향하는 발길이 차마 무거웠는지 나를 위해 밥상까지 차려 놓고 간 아내에게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선 11시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맥주를 하나 더 시켰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점심 드시고 가실 분 계신가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집에 갈 사람들을 보내고 남은 정예의 멤버 네 명이서 점심식사를 위해 삼겹살 집을 찾았다. 어차피 집에 아내도 없기 때문에 가볍게 한잔 만 더 하고 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렇게 시작된 점심은 1인 2병의 소주를 비우고 마무리되었다.
그 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노가리 집에서 소맥과 함께 노가리를 뜯었고 또 다른 무엇인가에 이끌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열두시간을 넘게 함께 하다 결국 집으로 순간이동 하였다.
순간이동 하여 도착한 집에는 쇼핑을 마친 아내가 눈에 불을 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난 더 이상 공식적으로는 조기축구에 나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