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드 없는 K장녀의 삶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잠시.
예체능을 전공했지만 거기서 약간 방향을 틀어 부모님과 같은 계열의 직군에 종사하는(이 과정에 부모님의 그림자가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나로서, <엘리멘탈>은 놀랍도록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멜랑꼴리한 여운을 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우선 내 인생엔 웨이드가 없으니까! 동화 속 공주님의 왕자님 부러워하기엔 제법 먹은 나이지만, 1K장녀에게 1 웨이드가 보급되지 않는 이상, 주된... 아마 대다수의 K장녀들은 오늘도 파이어플레이스에서 가게 오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잘 사는 1 세계 남자친구의 어머니(시... 어머니)의 눈에 들어, 그녀의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인턴으로 갈 기회를 얻는 일은, 그러고는 먼 타지로 훌쩍 떠나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일이다.
디즈니는 디즈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마법 같은 이야기-이 아름다운 로맨스-를 한편 다 보고 나니, (적어도 나는) 영화가 끝난 후 비현실에 푹 젖어 그래 나도 나의 꿈같은 게 있는데, 그래 나는 아직 젊은데 하며 갑자기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파이어플레이스 문을 박차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살짝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며 팝콘과 음료수를 버리는 동안 현실은 돌아왔고, 불현듯 친구의 친구 이야기에 오지랖 떨듯, 네이트판 펌글에 인용글 달듯 그들의 뒷이야기에 남몰래 걱정도 뒤따랐다. 내가 너무 앰버에 과몰입해서 그만...
제목이 내 인생에 웨이드는 없으니까여서 말인데, 그렇다면 웨이드 있는 엠버의 삶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자.
그들은 정말 괜찮을까?
먼 타지
다른 인종
다른 배경의
남자친구의! 어머니!
의 친구 (심지어)
회사의 인턴...
으로 들어간 그녀가 앞으로 마주할 세상이 썩 녹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이서 그 먼 곳으로 떠나갔는데, 그리고 웨이드는 사실 아직 여러 상황의 갈등에 대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둘이서 많이 싸울 텐데. 그보다 아직 웨이드는 엠버와 그녀가 느끼는 압박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는데! 물론 이는 그들이 거의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다손 치더라도(하물며 같은 문화권 남자들도 K장녀 감성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거라고 본다. 이게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다른 삶이어서.)...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지는 데에는 정말 많은 시간과 에피소드가 필요할 것이 눈에 선하다. 남자 친구 엄마 친구가 사장님인 그 자리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우선 차치해 두자.
그리고 언제든 돌아오라는 말. 가장 따듯하고 안심이 되는 말이면서도 한편에서는 족쇄가 되는 말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생각이 과한 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엠버가 인턴이 잘 안 돼서 파이어플레이스로 돌아간 어느 미래에서, 그러게 그냥 있지 그랬냐는 핀잔 섞인 말이 한 번도 날아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유리 공예인가 뭔지 하겠다고 나가더니~ 로 시작하는 넋두리 비슷한 말. 물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 거라고 믿는다. 그 순간들이 좀 힘들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앤딩이 정말 '디즈니' 스럽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의 뒷이야기가 썩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남긴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떨까. 웨이드가 있는 엠버도, 웨이드 없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서 유리공예를 하러 떠나는 엠버도, 파이어 플레이스에서 일하는 엠버도, 파이어 플레이스로 돌아온 엠버도, 앞으로 앞길이 구만리인, 모두 각자의 인생을 멋있게 살아내는 엠버이자 K장녀들인 것을.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과 디즈니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기도 하다. 이렇게 까지 주인공에게 절절하게 과몰입하면서 이 뒤가 어떨지 저쩔지 고민할 기회를 줘서. 언제 또 디즈니 여주인공에게 이렇게까지 몰입해 보겠는가.
처음에는 보면서, 보고 나서 이런 생각 나만했나! 하는 의문과 고찰을 찌끄리려고 시작한 글인데, 쓰다 보니 그냥 하지만 난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feat. 앰버)가 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끝에 뭐가 있을지는 가봐야 알고, 둘이던 하나건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되는 인생. 모레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건 내일은 파이어 플레이스에 출근 예정인 엠버로서 글을 마친다.
* 2023. 6. 26. 포스타입에 올린 글을 옮겨왔다.
PS: 무려 2년여전의 글이다. 이때는 내가 웨이드는 아니지만 물건너온 명문대 출신의 교포 남자친구를 만나서 내 짧은 연애역사상 가장 불타오르는, 짧고 굵으나 내인생에 큰 풍비박산을 일으킨 연애를 하게될줄은 몰랐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해야할까.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생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