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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Oct 24. 2024

부활

<문학나무> 2024년 겨울호 발표예정작 [사대성인 소설-그리스도편 1]

  그가 다가왔다.

  나는 대번에 그를 알아봤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는 몰라보게 야위고 상처투성이였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자기를 베어 낸 사람의 냄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나는 그의 메마른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는 몹시 비틀거렸다.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쓰러졌다. 나는 많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기운 없는 그 때문에 나는 길바닥에 동댕이쳐졌다. 하지만 난 이제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휘청거릴 때마다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이제 곧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그가 나를 힘들게 한 만큼 그도 고통받을 테니까.

  아침에 로마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십자가 들보로 쓰인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십자가의 주인공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그렇게 큰 죄를 지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까지 함께하게 된 것이다.

  몇 년 전,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그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알 수 없는 빛과 향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가 내 주인이 되리란 걸 한눈에 알았다.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니까. 우리가 운명처럼 묶여 있다는 걸 나무의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오랜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날개를 치며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 꿈을 이해하는 나무는 없었다.

  “넌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 허황된 꿈은 해로워.”

  “땅에 뿌리 박고 사는 나무가 하늘을 꿈꾸다니.”

  다른 나무들은 하나같이 나를 흉보고 비웃었다.

  “하늘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거야.”

  나는 힘주어 말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나는 별종이 되어 갔다. 그리고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달을 쳐다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나도 내 꿈이 엉뚱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꿈을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남다른 꿈 때문에 다른 나무들보다 사는 게 몇 배나 더 힘들었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그는 곧게 뻗은 내 몸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자는 구하리라.”

  그러고는 나를 도끼로 찍어 넘겼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아픔을 넘어서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몸이 베이면서도 가슴이 벅찼. 내가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그를 위해 몸 바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하늘을 나는 꿈보다 더 간절한 소망이 싹터 올랐다.

  그의 집엔 목공 도구가 많았다. 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낼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편히 쉬게 해 줄 의자가 되고 싶었지만 예쁜 탁자나 깔끔한 선반이 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 변하든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그는 목공 일엔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는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뭐가 그리 바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믿었다. 그가 산목숨을 베어다 그냥 내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믿음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얼마 뒤 그는 나를 창고에 처박아 둔 채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하늘이 와장창 무너지는 듯했다. 그때의 쓰디쓴 배신감과 절망감을 그가 알기나 할까?

  나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흑 속에 갇혔다. 끔찍하게 춥고 무섭고 외로웠다. 날마다 그를 애타게 부르며 기도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그를 사랑했던 만큼 끔찍이 증오하게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만 년은 지난 것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내가 간신히 숨만 쉬며 버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덜커덕.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가 온 걸까? 가슴이 뜨겁게 차올랐다. 그를 원망했던 마음은 간데없었다.

  문이 열리고 빛이 확 들어왔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나는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나를 창고 밖으로 들어냈다. 나는 나무장수에게 헐값에 팔렸다. 그리고 그 나무장수는 나를 로마인에게 넘겨 버렸다.

  그를 향한 분노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끝내 나를 버리고 만 그가 저주스러웠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 때문에 내 몸은 옹이처럼 단단해졌다. 내가 이렇게 무거워진 건 그래서다.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요. 그러니 나를 똑바로 메고 가세요.’

  하지만 그는 또 쓰러지고 만다. 나는 결국 다른 남자의 등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느새 해골이라 불리는 언덕에 올라왔다.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높이 세워진 세 개의 기둥이 보였다. 내 자리는 가운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빈 눈동자엔 세상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아려 왔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되니까.

  이윽고 그가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아!”

  그가 소리쳤다. 굵은 쇠못이 그의 손목을 뚫고 내 몸에 콱 박혔다.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양팔을 일자로 뻗은 채 나와 함께 십자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속이 시원하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응어리졌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리고 있다. 가슴속에선 뜨거운 것이 솟구치고, 심장은 천둥처럼 세차게 고동친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이제 보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몸에 스며들고 있다. 이럴 수가, 붉은 꽃으로 피어나는 듯 내 가슴이 달아오른다. 새로 태어나는 것만 같다. 그의 숨은 잦아들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대낮인데도 해가 빛나지 않는다. 그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이루어졌다.”

  그는 말하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와 함께 굉장한 일을 해낸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였다. 내 몸이 붕 떠올랐다. 어어, 이게 웬일인가. 하늘을 날고 있다!

  아직 어두운데도 세상이 또렷이 보였다. 나는 그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 아래, 언덕 위에 기다란 내 몸이 허물처럼 남아 있다. 그의 축 처진 몸과 함께. 울부짖는 검은 땅 위로는 하얀 빛너울이 세상을 어루만지듯 너울너울 내려앉고 있다.

  ‘주인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죽음 같았던 시간이 허공으로 스며든다. 그는 나를 버린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빛처럼 눈부신 그는 춤을 추듯 양팔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내 몸이 저절로 날갯짓을 했다. 나는 그의 날개가 되었으니까. 투명한 내 몸은 나뭇잎보다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나오는 찬란한 빛에 감싸였다. 그와 하나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니, 정말 꿈만 같다.

  그는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훨훨, 훨훨 날개를 치면서…….

  “이루어졌다.”

  내 입에서 그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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