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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May 09. 2021

파도는 일렁인다. 바다는 고요하다.

파도 위에 일어선 김에 서핑까지 타버려

 부모님과 캠핑을 자주 했던 강릉의 경포 해변은 유년의 추억 때문인지 익숙하고 포근하다. 백사장에 가만히 앉아 오고 가는 파도를 눈으로, 귀로 만져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일순간에 확 트인다. 아직까지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파도를 앞에 두고 앉을 때면 (아무쪼록 조금 남사스럽게 보일 행위 같기로서니) 나는 꼭 눈을 한번 감아 본다. 소리 때문이다. 멀리에서부터 아득히 들려오는 풍랑 소리는 내 고막에 닿았던 어떤 것 보다 그 기개가 씩씩하고 당당하다. 그 소리를 병에 담아올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얼굴에 하나둘씩 튀기는 차가운 물방울이 또렷하게도 느껴진다. 입에서 나는 건지, 코에서 나는 건지 은은하게 풍기는 '짠내'까지 여기에 합세한다. 그러면 입가가 흐물 해지면서 어느새 삭- 올라간다. 아마도 이건 이성의 관할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모은 손 끝을 밀려오는 파도 끝자락에도 넣어본다. 미끄러지듯 오고 가는 물의 감촉은 터프한 파도 소리와는 달리 순순하고 부드럽다.


 모르긴 몰라도, 멀리에서 바라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느끼는 것 사이에는, 손에 닿는 작은 파도 물결과 먼 곳부터 들리는 거대한 풍랑 소리만큼의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오늘 내 마음 곳곳에서 크고 작은 파도가 일었다.


 때론 팍팍한 이 세상, 임자 덕분에 잘 살고 있다느니, 자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느니. 저 하늘 끝까지 서로를 치켜세워줄 땐 언제고, 같은 집에 사는 그 남자와 한 판 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일어 난다. 그 자와의 마찰은 눈곱보다 사소한 "입은 옷 좀 걸어놔." 라는 말에서 기인했다. 거듭 말하는 것이지만, 일어날 일은 사안의 경중과는 크게 관계없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어느 날엔 사소하기 때문에 그것이 개최될 수 밖에 없는 패착이 있기도 하다. 서로의 말이 더 타당하다고 우기는 '우기기 대회' 말이다.


 어제 당근 마켓에 안 쓰는 물품 몇 가지로 무료 나눔 하는 글을 올렸다. 새 상품이라 그런가? "제가 할게요." 라며 곧바로 채팅창이 띡- 떴다. 속.전.속.결. 다음 날 오전 11시로 약속이 성사됐다. 물건을 전달한 뒤 12시에는 어버이 날 기념으로 가족들과 점심 식사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을 지켜주십사 구매자에게 해당 내용도 간략히 언급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인 11시로부터 5분.. 10분... 20분이 지나도 상대는 묵묵부답. 11시 45분 메시지가 왔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새까맣게 잊었네요. 내일 가능할까요?"


 앞서 말했다시피, 가족들과 모이기로 한 시간은 12시. 그리고 모임은 다들 시간이 편하다고 한 주말 점심. 잘 오고 있는지 확인 차 모임 구성원에게 연락해보니 그제야 12시 20분에 도착한다며 미안하다는 동생의 카톡 도착. 주중에는 불투명한 퇴근 시간으로 그럴 수 있지만 집에서 출발한 주말까지?

 



 순식간에 몰아치듯 일렁이는 파도를 느껴본다. 가만히 느껴본다.


 파도는 언제나 같다. 거세게 몰아치다 흔적 없이 흩어지고, 생겨나고 없어지고, 생겨나고 없어진다. 평소 나는 똑같은 걸 반복하는 단순 노동을 가장 두려워 하는데 얘는 지겹지도 않나?


 파도는 언제나 다르다. 풍력 계급이 5의 바람인 '흔들바람'이 불 때, 바다에는 작은 물결이 인다고 한다. 풍력 계급 11의 몹시 강한 바람인 '왕바람'이 불 때면 바다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인다고 한다.




 그러나 파도가 그럴 뿐, 바다는 고요하다. 바다는 그 파도들 전부를 그저 알뿐이다. 이럴 땐 파도가 이런 모양이구나, 저럴 땐 파도가 저런 모양이 되겠구나. 고요하기에 갖가지 미묘한 파도를 생긴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면면히 일어난 파도의 형체를 고스란히 수용한다.


 일렁임을 가까이 보면 난리굿 같지만, 바다 전체는 여전히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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