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왜 재밌나? 회·빙·환 클리셰로 급속성장하니까!
한국의 80년대는 군사독재의 잔재와 이후에 등장할 문민정부 세력들이 격렬하게 투쟁하던 시대였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이빨 꽉 깨물고 열심히 해서 잘 살아보세'였고, 우리나라는 어느 순간 세계의 공장이 되어있었다. 마치 지금의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말이다.
어쨌건 당시는 노는 분위기가 아니고 일하는 분위기였다. 문화보다는 경제, 엔터테인먼트보다는 워킹라이프가 우선시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되기도 했다.
어른들 세계의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린이나 10대 수준에서 즐길 수 있는 수준 높은 문화 콘텐츠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더군다나 제일 돈이 안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문학 따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우리시대」라는 청소년 인문교양 잡지가 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발행인은 한샘출판사의 서한샘 씨라고 하는데.. 한샘이라면 국어다.
50·60대 이상 장년층들에게 국·영·수 하면 잊을 수 없는 수험용 참고서가 셋 있었다. 바로 '한샘국어', '성문종합영어', '수학의 정석(定石)'이다. 맨투맨영어나 해법수학 같은 책들은 그 뒤에 나왔다.
그중 국어교사 출신 스타강사 서한샘 씨는 돈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청소년 인문교양 종합 매거진 「우리시대」를 세상에 내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본인의 인생관이 강하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86년 12월의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뒤 「우리시대」는 저조한 판매로 인해 폐간된다. 대략 1년 정도 버텼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잡지를 한 권씩 사 모으면서 나는 쉬운 언어로 적힌 많은 지적 자양분을 섭취했고, 그 기억들 중 한 모금이 오늘 브런치에 올라가고 있다. 40년간의 초연결이라고나 할까.
창간호였는지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은데, 당시 모 대학 철학과 교수님의 글이 한 편 게재되었다. 내용은 청소년을 위한 철학.. 뭐 그런 것이었을 테다. 글에서 교수님은 이런 얘기를 했다.
저는 만화방에 갑니다. 가서 무협지를 봅니다. 철학교수가 왜 무협지를 읽냐고요? 사람들이 무협지에 왜 빠져드는지 알고 싶어서지요.
나는 여기에 완전히 꽂혔다.
어떤 한 단어에는 사회적 맥락의 이미지가 뉘앙스(어감)라는 형태로 얹혀 있다. 80년대 당시의 '만화방' 또는 '대본소'라는 단어에 덧씌워져 있던 어감은 2025년으로 컨버전하자면 '성인PC방'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찾는 사람이 있으니 없어지지는 않지만, 드러내어 권장하기에는 좀 그런 것. 즉 그때의 만화방은 지금의 북카페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지금의 웹툰·웹소설 작가들은 사회적 편견도 없고 오히려 차세대 유망직종으로 인정되는 양지의 문화예술인이다. 하지만 (구) 무협이라 칭하던 당시의 무협지 작가들에 대한 인식은 좀 많이 달랐다. 실명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대학교수?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지성인이다. 사회적 존경의 강도는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가 더 높았으리라. 그런 지성인이 만화방엘? 그것도 무협지를 보러? 신문기사 헤드라인이었다면 조회수깨나 나올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만화는 숱하게 봤어도 무협지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협지가 어떤 내용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빠져든다는데 왜 그런지 나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수님도 본다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야 철학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책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였다. 우리시대와 같은 해인 1986년에 초판이 나왔다. 철학이라는 것, 플라톤, 기하학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렇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다음에 본격적으로 얘기할 계획을 갖고 있으니, 오늘은 너무 옆길로 빠지지는 말자.
결국 나는 만화방엘 갔다. 일반만화 코너와 무협지 코너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 있고, 두 코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인구통계학적으로 볼 때 차이가 꽤나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상당한 부담을 무릅쓰고 무협 쪽으로 가서, 그럴 듯 해 보이는 것들 중 한 권을 골라 뽑았다.
당시 내가 골랐던 책의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핏빛 한자로 써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제일 허걱했던 것은 인쇄조판이 세로 방향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세로조판이 아주 이상한 건 아니었다. 가로조판으로 추세가 바뀌긴 했지만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던 시절이니까 말이다.
여하튼 그날 난생처음 잡은 무협지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잠금해제된 핏빛 선연한 폭력'이었다.
- (2)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