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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를 탐독했던 철학교수(2)

웹소설 왜 재밌나? 회·빙·환 클리셰로 급속성장하니까!

by 김톨
AI 생성 이미지 : MS Bing Image Creator





핏빛 선연한 폭력 Vs. 스타일리시한 폭력



난생처음 손에 쥔 무협지. 당시 만화방이란 장소에서 오는 약간의 위화감에 세로로 읽어야 되는 기묘함이 뒤범벅된 채 나는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 무협지와 관련해서는 제목도 내용도 구체적인 것들은 다 기억나지 않는다. 썩 와닿는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 차라리 말초적인 재미라도 있었다면 좀 달랐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당시 대본소 시장의 인기작에 대한 정보가 없었으니 대충 아무거나 B급을 골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자비한 살육과 복수였다. 한자를 남발한다 싶을 정도로 많이 썼고, 고등학생이 보기엔 부적절한 19금 콘텐츠가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협계에서도 이 시기의 저급 번역판 문제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양산형 무협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내가 손에 쥐었던 작품이 그런 것들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나는 그날 만화방에서의 무협지 체험을 통해 철학교수님과 같은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오후 반나절 무협지 뒤적거리면서, 인간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심층적인 욕망구조를 파악하겠다고? 후훗. 솔직히 좀 오글거리는 얘기다.


큰 소득은 없었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의 독서인생에 무협이라는 장르소설이 하나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나도 이제 무림(武林)이 뭔지 아는 초보 무협독자가 되었다.


시작이 반이다. 그 뒤로 나는 무협계 초대형 베스트셀러인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를 시작으로 2000년대 대본소 신무협을 거쳐, 2010년대부터는 주로 남성향 웹소설 플랫폼에서 정통무협과 현대 판타지물을 즐겼다.


이제껏 읽어본 바로, 무협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폭력에 대한 판타지적인 묘사이다. 물론 권선징악을 기본 반찬으로 깐다. 이것은 폭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무조건 지켜야 될 마지노 선이다. 무협지의 폭력이 권선징악의 테두리를 넘는 순간 양지에서의 비즈니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기본적 틀 안에서 무협은 문파, 검법, 내공, 비급, 영약, 기연 등 다양하면서도 정형화된 소재를 갖고 그들만의 세계관, 즉 강호(江湖)와 중원(中原)을 합친 무림(武林)이라는 독자적인 시공간을 마련했다.


현실과 분리된 그 공간에서 권선징악을 전제로 한 '복수'라면 '살인'이 허용된다. 악적이 '살해' 당하는 것은 비윤리적이지 않다. 인과응보와 정당방어의 명분으로 용납된다.


현실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폭행일지라도 범죄행위로 처벌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자극적인 폭력에 감정이입되는 경험을 오히려 열광한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나?


문제는 계속 이어진다. 비록 허구의 공간일지라도 창작자가 '폭력'이란 것을 묘사하려면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다못해 때리기라도 해야 되는데. 아무리 상상의 공간에서라지만 '누굴 왜 어떻게 죽여야 될까?' 이건 작가 입장에서 상당히 골치 아픈 숙제다.


그렇다고 폭력을 묘사해야 될 때마다 매번 권선징악 논리를 끌어다 쓸라치면 - 니가 잘못했으니 그냥 죽어! - 너무 식상하고 소재가 곧 고갈된다. 잘못도 한두 번 아닌가. 그래서 유명한 서양 판타지 대작들을 보면 차라리 몬스터를 등장시킨다. 오크, 골렘, 드래곤 이런 친구들 말이다.


몬스터의 등장은, 신화적 캐릭터가 반드시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독자들이 원하는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등판시킨 것일 수도 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보라.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라. 몬스터라면 인격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죽여도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너무 잔혹해서 사이코패스 얘기가 나올 정도가 아니라면 취급가능하다. 이런 것들이 스타일리시한 폭력이다.


현재 한국에서 남성향 웹소설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정통 동양무협, 서양 판타지, 현대판타지(퓨전)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된다.


정통무협은 말 그대로 동북아권에서 예전부터 이어오던 무협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창작되는 서양판타지는 북유럽 신화에다 드래곤, 소드마스터 같이 동양무협적인 요소를 합친 스타일이다. 현대판타지는 그 외에 세계관이 정형화되지 않은 나머지 모두를 말한다. 재벌물, 게임물, 스포츠물, 대체역사, 밀리터리 등이 총망라된다.


무협이 아닌 다른 판타지들 모두 폭력이라는 원초적인 코드를 갖고 있다. 드러나는 모습이 조금씩 다를 뿐 본질은 폭력이다. 무협 외의 다른 장르에서는 폭력을 구현하기가 좀 더 용이하다. 서양 판타지라면 인간이 아닌 몬스터를 상대로 폭력을 마음껏 행사하면 되고, 만약 현대 판타지의 스포츠물이라면 상대방보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폭력에 준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와 같이 웹소설 트렌드만 살펴보자면 사람들은 대부분 폭력을 원한다. 다만 핏빛 선연한 저질 폭력은 시장에서 도태되었고, 양지에서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폭력이 시장을 계속 확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저것이 폭력인지 뭔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렇듯 '폭력'이란 것은 구무협부터 2000년대 신무협 시대를 거쳐 현재의 웹소설 무협에 이르기까지 가장 일관된 주제였다. 달리 새로울 것은 없다는 얘기다. '폭력'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논의도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주제이지만 그건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이번 포스팅의 의도는 따로 있다.




더 고급진 폭력소비를 위해 도입한 첨단기술, 회·빙·환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장르문학계에 비즈니스 측면에서 격변이 몰아쳤다.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스마트폰 때문이다. 혁명적인 인프라의 변화는 정말 어마어마한 여파를 만들어 낸다. 이 무렵부터 사람들은 무협지를 만화방이나 대본소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읽기 시작했다. 남성향만 놓고 볼 때 웹소설 1위 온라인 플랫폼은 단연 '문피아'다. 사실 2010년대 초반 나는 업무상 미팅 자리에서 우연찮게 문피아 얘기를 전해 들었다. 지인은 나에게 '원래 무협을 쓰시던 작가분이 있는데, 이 분이 작가들은 창작에만 전념하면 되도록 자기가 인터넷에 멍석을 제대로 한번 깔아보겠다고 만든 무협 사이트가 있다'라고 했다. 그게 문피아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전환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비즈니스 규모를 훨씬 더 크게 만든다. 같은 온라인이라도 PC에서 스마트폰으로의 2차적인 전환은 더 큰 폭발력이 있었다. 이전 대비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원래 만화방, 대본소에 못 가던 사람들이 간편하게 핸드폰으로 무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남성향의 경우 플래그쉽 스토어는 문피아였다. 매장이 더 커졌으니 더 많은 제품을 진열해야 된다. 더 다양한, 더 새로운, 더 고급화된 제품 라인업이 필요해졌다. 따지고 보면 밀레니엄인 2000년대에도 신제품은 필요했다. 사실 이때 신제품 컨셉으로 시장에 나온 것이 중세 판타지라고 본다. 주제는 동양무협의 것을 유지한 채 소재를 서양식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새롭다. 신제품 맞다.


내 기억에 2010년대 이후 여전히 빈칸이 많은 진열대를 소재면에서 활발하게 채워나간 것은 현대판타지들이었다. 헌터물, 게임물, 재벌물 등 다양한 소재들이 지속적으로 장르문학의 세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장르문학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폭력'이다. 사실은 하나 더 있긴 하다. '19금'인데 이건 필자가 언급할 역량이 없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건 신제품을 구상함에 있어서, 주제는 바뀔 게 없었고 소재면에서는 웬만큼 채워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확대된 시장을 따라가기에 여전히 공급부족 상황이다. 뭔가 근본적인 업그레이드를 작가도 독자도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주제나 소재가 아닌, 클리셰 측면에서 장르문학에 불어닥친 가장 큰 바람이 바로 ‘회·빙·환’이다.


나도 처음에는 회·빙·환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어떤 유튜브에서 보고 알게 되었는데, 회귀·빙의·환생의 3종 세트란다. 그 유튜버는 요즘 웹소설 작가하려면 무조건 회빙환 달고 가야 된다는 친절한 멘트를 덧붙이기도 했다.


자 드디어 이제 권선징악과 사필귀정 밖에 없었던 기존의 전통 클리셰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신상이다. 기존에 차고 넘치던 천편일률적인 작품들도 회·빙·환 클리셰를 입히면 산뜻한 신상으로 변모했다. 공급도 수요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지금 타이밍에 다시 철학교수님 스타일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나는 현역 웹소설 작가도 아니고 한국 장르문학사를 쓸 생각도 능력도 없다. 내 관심은 ‘인간학’이다. 사람들은 왜 회·빙·환에 열광하는가? 회·빙·환은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엇을 던져 주는가? 거기서 우리는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가? 철학교수님처럼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회·빙·환과 관련하여 내가 찾은 답은 '불확실성의 제거'라고 말할 수 있다. 얘기가 좀 길다.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까지 하면 이번 미니 연재가 끝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인간학 여정을 위한 내 허름한 노트에 가끔은 메모 하나씩 적으면서 갈 생각이다. 워낙에 미로 같은 여정이라 큰 줄기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지금 이건 첫 번째 노트다. 잘못 적은 게 있다면 나중에 직직 긋고 다시 적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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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최종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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