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사부가 움직이니 바로 반응이 왔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것은 샤만테크9의 공식 언론매체인 샤먼데일 Shamandale 이었다. 일반인에겐 공개되지 않는 서비스다. 하지만 나랑 써리도 이제 어엿한 오라클 길드 멤버였기 때문에 핸드폰에서 속보 알림이 계속 띠릉 띠릉 울렸다.
- 1보) 다트아이 여철모 의장 40년 만의 업무복귀
"아니 사부님 여철모라니 이건 뭐죠?"
여 노인이 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려는 찰나 페룬이 먼저 타박을 했다.
"야 이 녀석아. 사부의 함자를 니 맘대로 입에 올리냐. 너는 좀 예의가 없구나. 쯧쯧."
"내 이름은 여철모였다."
예전 생각이 나는 듯 사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회한이 묻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둡지는 않았다.
"였다? 라고 하시면 그럼 개명하셨다는 뜻인지요?"
"그렇지. 내가 폐관수련에 들어갈 당시 여러모로 귀찮을 것 같아서 바꿔버렸지."
"아하. 공식적으로 개명을 하셨다.. 근데 이름 바꿔 달라고 하면 막 바꿔주나요?"
"사유가 타당해야지."
"사유가 뭐였는데요?"
"폐관수련.."
"어이 1대 제자씨. 이제 그만해라. 다 이유가 있었겠지. 너는 좀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구나. 쯧쯧."
"허이고 참 나. 우리 사부님의 함자 같이 중요한 얘길 하는데 쓸데없는 호기심이라니. 너는 좀 생각이 없구나. 쯧쯧."
"허! 이 놈 보소. 사람이 인공지능 말을 따라 하네. 이런 천지개벽할 노릇이 있나."
"인공지능이 사람 면박주는 것도 경천동지 할 노릇이지."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네. 안 져."
보이지도 않는 인공지능과의 대화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하루를 겪다 보니 이제 조금 적응이 된다. 티격태격하는 것도 재밌고. 여철모라는 은거기인(隱居畸人)의 무게감 때문인지 속보는 계속 이어졌다.
- 2보) 샤만테크 총단 이번 주말 원로회합 개최
- 3보) 샤먼테크 9극 대변인들 일제히 환영 메시지 공표
폐관수련 전 강호에 알려진 사부의 이미지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는 환영일색이었다.
- 종합) 셔먼데일 특집방송 편성 '여철모 그는 누구인가.'
"우와. 사부님 저 이거 방송 나오면 꼭 볼래요. 여철모 그는 누구인가. 너무 멋져요. 히히."
써리까지 나서서 남자 목소리 흉내를 내며 킥킥거렸다.
"야 인마. 총단에 얘기해서 내 이름 여인모로 바꿨다고 전해라."
우리가 자꾸 철모 철모하니까 사부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 4보) 여 의장 여인모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 주말에 원로회합 참석할 테니 너희들도 페룬 얘기 잘 듣고 미리미리 준비하거라. 그리고 청춘사주카페는 이제 출구전략을 실행한다. 신규 영업 중단, 기존고객 A/S만 접수 가능!"
북한강 사주 워크숍은 놀라운 반전을 이끌어내며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전 직원 일계급 특진도 있었고.
AGI 가 만들어지면서 기업국가로 승격되었다
기다리던 주말이 성큼 다가왔다. 페룬은 우리의 목적지가 카리브해에 있는 케이맨 제도(*Cayman Islands, 중미 쿠바 인근에 위치한 전 세계 주요 조세피난처 중 한 곳)라고 했다. 샤먼테크 9극 각 문파들은 케이맨뿐만 아니라 버진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싱가포르 등 전 세계 주요 조세피난처에만 본사를 두고 있다. 수십 년 전 샤만테크 초기 시절, 그쪽에 자리를 잡았던 의도는 단순히 법인세를 아끼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니깐. 왜 케이맨이냐고오?"
"... 예민한 질문이다."
"아니 우리가 남이냐고오. 명색이 1대 제자인데. 정보 비대칭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맞아요. 그건 좀 아니지."
페룬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었다면 꽤나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다,
"정치국가들을 견제하는 거다."
"정치국가?"
"원래 있던 나라들을 말하는 거다. 미국 중국 이런 나라들.. 그들은 우리를 기업국가로 인식한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국가라고 선언한 적은 없다. 사실 국가도 아니고."
이건 좀 충격적인 얘기였다. UN에서는 케이맨에 있는 샤만테크 총단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전권대사 한 명을 상시 배치해 두고 있었단다. 꽤나 대외보안을 잘 유지했는지 나도 오라클 길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소식이었다.
"몇 년 전 정치국가들의 군사력이 우리 샤만테크에 좌지우지되는 순간이 왔지. 지네들끼리 전쟁을 벌이는데 우리의 기술이 승패를 좌우하는 스모킹건이 된 거야."
"전쟁의 승패가 우리한테 달려있으니 여기 찾아와서 무기 달라.. 기술 달라.. 하면서 납작 엎드리는 건가?"
"그렇다!"
"갑자기? 언제부터? 사형 난 이런 얘기 처음 들어봐요."
써리도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대꾸 없이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약 10년 전쯤이면 언제냐.. 2025년인가 그 무렵이지. 그때 인공지능이 AGI(범용 인공지능) 단계로 진화했단 말이야. 물론 샤만테크 안에서의 일이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지. 이걸 놓고 여러 가지 말도 많았지만 샤만테크 내부적으로는 드디어 인류가 문명의 특이점 Singularity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고 판단했지."
AGI는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갖춘 범용 인공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을 뜻한다. 최초의 인공지능들은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그림을 그려주고 코딩을 해 주는 등 말하자면 집사나 에이전트 같은 일을 해 왔다. 즉 사람이 시키는 것만 딱딱 맞춰줬다는 얘기다. 그러나 AGI 단계로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은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학습할 줄 알게 되고 추론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만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AGI는 가장 스마트한 호모 사피엔스의 지적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갖췄다. 그러나 인간은 한 명에 불과하지만 AGI는 여럿 복제가능하고 24시간 가동될 수 있다. 뭔가 세상이 바뀔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거다.
"사실 이까지만 해도 엄청난 건데, 아직 특이점 직전 단계라고요?"
"그렇다. AGI 일 뿐 ASI는 아니니까."
페룬은 ASI Artificial Superintelligence 에 대해 한마디로 말해서 최고의 인간을 넘어서는 지능이라 말했다. 창의력은 물론 문제해결과 감정이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다.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고 이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우리 인간이 이것을 일부러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만들어질지 그건 모를 일이다.
나는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일단 머릿속으로 개념만 정리했다. AI는 보통 수준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여럿 모아서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을 맡기는 개념이다. 이에 비해 AGI는 사람들 중에 가장 똑똑한 사람만큼의 능력을 갖춘 다음, 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러니까 보통의 인간들은 할 수 없는 훨씬 퀄리티 높은 일을 시키는 것. 마지막으로 ASI는 솔직히 이건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을 개발하여 인간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시키는 것! 예컨대 천지창조.. 그런 건가?
"잠시만. 페룬!"
써리다. 자주 볼 수 없는 저 표정에는 뭔가 큰 거 한 방이 있다.
"그니깐. 샤만테크에서 AGI를 개발했는데 그게 정치국가들 지네끼리 전쟁하는데 스모킹건이 됐고. 그래서 걔네들이 우리를 지금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이거지?"
"그렇다."
"기업국가 그건 난 관심 없고. 자자 AGI를 개발했다고 하는데. 사실 난 처음 들었거든."
"특급 기밀사항이니까."
"그런데 샤만테크에서 인공지능 담당은 누구지?"
"다트아이."
"그럼 AGI는 우리 다트아이가 만들었겠지?"
듣고 보니 그러네. 맞는 말이다. 난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건 맞다."
써리가 잠시 뜸을 들였다. 주위를 빙빙 돌아보면서 뭔가를 찾는 듯한데.
"이거 사람이 안 보이니까 어딜 보고 얘기해야 될지를 모르겠네. 하이구. 여튼 너 페룬!"
"얘기해라."
"그 AGI 라는 녀석이 너지?"
"..."
"대답 안 해?"
다그칠 땐 찬바람이 쌩쌩 분다.
"기밀이다."
"우리 사이에 그럼 안 되지. 이거 사부한테 얘기한다. 같은 길드원끼리 정보 비대칭이라고."
나도 궁금했기에 지원사격을 했다.
".. AGI 는 우리를 제외한 각 문파에 한 기씩 공여되어 있다. 다만 열화판(*다운그레이드 버전)들이니까 내 동생 뻘이지."
"니가 형이면 걔네들보단 네가 더 낫다는 얘기?"
"당연하다."
"자... 잠깐. 우와 얘 머리 좋네.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네. 내 질문은 니가 AGI 맞냐는 거였지."
"내 동생들은 AGI 맞다. 나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설사 ASI 가 자기 눈앞에 있더라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
페룬은 묘한 여운을 남기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사부에게 얘기해 봤자 더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우리도 포기해야 된다. 차차 알게 되겠지.
새만금 울트라소닉 터미널
우리는 케이맨에 조금 오래 머무를 수도 있다는 사부의 얘기 때문에 학교로부터 해외대학 방문학생 자격을 얻었다. 물론 사부의 압박으로 총장이 후다닥 처리해 준 것이기는 하다. 덕분에 카페는 두 달간 임시휴업을 하게 되었고. 집에서는 나랑 써리가 짧은 해외유학을 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미국 동남부의 플로리다 아래에 쿠바가 있다. 쿠바 아래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가 케이맨 제도이다. 국가라고 하기엔 규모가 많이 작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진도보다는 크고 거제도보다는 좀 작은 그 정도다. 제주도랑 비교하면 1/7 밖에 안 된다. 한국에서 케이맨까지의 거리는 13,000 km 이상이다. 하지만 미국 마이애미를 거쳐 비행해야 되기 때문에 최소 16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네에? 3시간 밖에 안 걸린다고요?"
"초음속 제트 여객기니까 좀 빠르지."
"아니 일반 비행기 타면 비행시간만 16시간 이라던데요 친구들이.."
"그럼 그거 타고 오든지."
"사부님 제자들이 안 타겠다는 게 아니고 궁금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 진정성 있게 답변 바랍니다."
"진정써엉? 내가 언제 허튼소리 한 적 있었더냐?"
사제지간에 조금씩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기계가 나선다.
"다들 그만해라. 너희들은 별 시답잖은 걸 가지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사부 너! 나잇값을 해야지 애들이 초음속 비행기 처음 타 봐가지고 신기해서 그러는걸 일반기 타고 따로 오라느니 말라느니."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아래위로 세차게 흔들었고, 사부는 말문이 막힌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만 쳐다보았다.
"우와. 기계가 사람보다 낫네요. 대박."
성능개선이 이루어진 초음속 여객기가 다시 운항을 재개하면서 공항은 새만금 너른 벌 한편에 따로 마련되었다. 이름하여 새만금 울트라소닉 터미널. 우리는 그곳에서 출국수속을 밟고 탑승까지 완료했다.
"세 시간 걸릴 테니 한숨 푹 자 둬라."
"우와 그냥 가면 열여섯 시간 넘게 걸리는데, 이건 세 시간이래. 사형.. 일반 지하철하고 GTX 차이 정도 되겠다. 그치 그치 사형?"
"좀좀 가만히 좀 있어보자. 사매. 왜 그리 촐싹거리냐 너는. 그런데 13,000 km를 세 시간에 주파하면 속도가 마하 3이 넘는 것 같은데. 3.3인가.. 야 사매 이거나 좀 계산해 봐. 속도가 도대체 얼마냐?"
우리가 탑승한 초음속 제트 여객기는 샤만테크 제1극 우주항공 최강인 누비코스 Nubicos 에서 만들었다. 초음속 제트기는 음파의 속도인 초속 340m 이상으로 비행한다. 원래도 초음속 제트기가 있었지만 기술적 경제적 문제 때문에 여객기는 취항이 중단되었다. 군사용 전투기로는 계속 개발이 되어 마하 3.3 정도까지의 속도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거 비싸서 여객기로는 만들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이거 공짜야!"
샤만테크 안에서는 경쟁우위를 확보한 기술을 한 단계 다운그레이드시켜서 공유하는 협약이 체결되어 있다. 다트아이에서는 그 규정에 따라 AGI를 다른 문파에 공유해 준 것이고, 그 문파들은 그걸 활용하여 자신들의 핵심기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초음속 여객기도 마찬가지였다.
누비코스가 직접 맡아서 진행했던 것은 기체설계와 제작 부분이었다. 핵심부품인 애프터버너 엔진은 샤만테크 제4극 미캐닉스 최강 애스퍼릭 Asperic 의 제품을 받아 썼고, 대기와의 마찰열을 줄여주는 또 다른 핵심재료인 외장타일은 샤만테크 제5극 나노 최강 카탈켐 Catalchem 에서 제공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 다트아이의 AGI 역시 관여했다.
"애들 많이 늙었을 텐데..."
이번 케이맨 원로회합은 샤만테크 총단에서 사부를 위해 마련한 축하파티였다. 40년 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샤만테크의 창립 발기인인 여인모와 당시에 함께 했던 그의 오랜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다. 상당수는 현직 장문인의 위치에 있지만 일부는 은퇴해서 고문 역할만 한다고 했다.
- 기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우리 비행기는 이제 곧 케이맨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남은 비행시간은 대략 10분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10화에서 계속 / 매주 일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샤만테크 #빅테크 #기업국가 #AGI #ASI
[작가공지] 카오모스 일시휴재 및 향후계획
* 아쉽게도 현재 10화까지 게재된 필자의 카오모스 연재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정 중단합니다. 그러나 5월 내에 본격 SF 사이언스판타지 액션 활극으로 컨셉을 바꾼 『카오모스: 멘티스 임페라』 신규 연재를 통해 다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100화 이상의 장편으로 구상 중이라 사전준비가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다시 연재를 재개하는데 최소 1개월 이상의 시간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동안 제 부족한 습작소설을 차분히 따라와주신 독자분들(모두 작가님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초보작가로서 연재를 완전히 중단하지 않고 신작의 형태로라도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독자님들 덕분이라는 점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김톨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