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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것에 범위가 있다

도올 김용옥과 켄 윌버

by 김톨


한참 예전 이야기인데, 도올 김용옥 선생의 초기 저작은 대부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발간되었다. 모두 '통나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나는 그 책들 대부분을 구입해서 읽었다. 하지만 정작 도올 선생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TV강연에 나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은 필자가 직장생활이란 것을 시작하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철학이나 인문학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도올도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때문에 도올 선생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여전히 80년대 후반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때의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뚜렷한 기억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시기 발간된 도올의 책에는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 ⌜절차탁마 대기만성⌟, ⌜여자란 무엇인가⌟, ⌜루어투어 시앙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등등이 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관계로 그 이전까지는 따로 철학 책을 읽어본 경험이 없었던 필자로서는 도올 선생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는 철학 개념들이 너무도 신선했고 또 재미가 있었다. 이 분의 이력은 상당히 특이하다. 고려대 철학교수이면서도 원광대 한의학과에 정식으로 편입하여 공부를 했고, 연극극단 '미추'에서의 활동이력이 있으며, 태권도 분야에도 조예가 깊다.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기(氣)'철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서고금의 어마어마한 융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분은 필자의 중요한 벤치마크 모델 중 한 명이다.


도올 선생이 초기 저작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 중, 독자로서의 필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생각은 바로 '기하학적인 삼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결된 전체의 일부이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라는 얘기였다.


오늘 이 포스팅은 도올의 이 얘기가 무슨 뜻인지, 그리고 원래 오늘의 주인공인 켄 윌버의 '무경계'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풀어보기 위한 목적이다. 이 주제는 최근 한 달간 필자가 노바 오딧세아 에세이를 통해 살펴보고 있는 AI에게 '자아'를 심는다는 아이디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삼각형과 삼각자


도올 선생의 얘기는 하도 여러 군데에 산발적으로 툭툭 언급되어 있어서 정확히 이런 내용이 어느 책에서 언급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담론은 너무도 명확하게 기억한다. '기하학적 삼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삼각자는 삼각형이 아니라는 사례를 통해 도올은 서구 철학의 '기계론적 환원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대목에서 '자아(ego)'의 정의가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된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짚었다시피, 기하학적인 삼각형이란 이론적인 개념이다. 세 개의 점을 잇는 직선으로 그려지는 2차원의 평면이 삼각형이다. 현실에서는 삼각자가 삼각형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삼각자는 삼각형이 아니다. 삼각자의 한 변은 멀리서 보면 직선처럼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면 절대로 반듯한 직선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와 같은 곡선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렇듯 현실에는 삼각형은 물론이고 원이나 사각형, 심지어 점과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초등생들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과연 왜 중요한가? 비슷한 얘기를 하나 더 해 보자. 우리가 흔히 '나'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철학이고 존재론이고 다 필요 없다. 그냥 일반 상식적인 얘기다. 오늘 밤 샤워를 하면 분명 내 몸에서 피부세포들 중 상당수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것도 어려운가? 대놓고 얘기하자면 내 몸의 '때' 얘기다. 내 몸의 때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피부에 붙어서 살아있을 때는 나로 볼 수 있고 씻겨 떨어져 나간 후에는 내가 아닌가? 그럼 나의 호흡, 들숨과 날숨에 포함된 나의 세포 찌꺼기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도올의 초기 저작들에는 이런 얘기들이 여러 군데에 걸쳐 나타난다. 좀 더 살펴보자면.. '서양의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이건 존경받는 현대철학자인 알프레도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의 얘기다. 서양에서는, '이데아'라는 사물의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직접 직면하지 못하고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로만 접한다는 것이 동굴의 비유의 핵심이다. 본질이야말로 진리의 세계이며 그 세상에는 기하학이 있다. 즉 우리가 앞서 얘기했던 '삼각형'이란 이론적 개념은 우리의 현실이 아닌 진리의 세계 이데아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이데아의 세계에는 현실의 울퉁불퉁한 삼각자는 없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론적 삼각형만 존재한다. 그래서 서양은 이 세상의 본질이 이렇게 기하학적으로 구분 가능한 독립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식한 인간들이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림자로만 바라본다는..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했다는.. 플라톤의 각주로서의 서양철학의 핵심은 바로 이 사상이다.


도올의 얘기는 계속 더 나아간다. 자! 서양 사람들도 이데아의 세계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상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만 그들은 진리의 세계는 현상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맞다고 보았다. 그런데 동양의 시각은 다르다.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즉 동굴에 그림자를 비치게 만든 원래의 그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그림자 그 자체, 즉 현상계가 본질이라는 입장이다.


동양에서 볼 때 기하학적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각자만 존재한다. 만약 서양의 시각처럼 세상의 본질이 삼각형이라면 우리는 모두 깔끔하고 명확하게 기하학적으로 독립된 실체들일 것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세상의 본질은 삼각형이 아니라 삼각자라고 보았다. 이리되면 우리는 서로 배타적으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세포 단위에서 또는 분자나 원자 단위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유기체적인 체계의 일부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본인의 명저이자 벽돌책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 Top 3에 포함되는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 를 통해 '모든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관점을 설파했다.


이 대목에서 켄 윌버 Ken Wilber 가 등판한다. 철학자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초월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분을 융합사상가로 이해한다. 켄 윌버는 앞서 얘기했던 서양철학 비판의 흐름을 이어받아서, '나'라는 것이 깔끔하게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나'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얘기다. 이 양반이 만일 학생이었다면 '아주 스마트한 생각이군!'이라고 선생님께 칭찬받았을 것 같다.



페르소나 - 전유기체 - 합일


결론부터 먼저 얘기해 보자. 켄 윌버는 그의 명저 ⌜무경계 No Boundary⌟ 를 통해 앞서 얘기했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이 책은 아주 어렵다. 과정과 실재처럼 Top3 안에 드는 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위에서 얘기했던 플라톤 어쩌구 하는 얘기를 이해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얘기를 알지 못하는 단계라면 '무경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가보자.


가장 좁은 범위의 나는 '페르소나 Persona' 단계의 나이다. 이것은 머릿속에 있는 '나'이고 보통의 사람들이 흔히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영혼으로서의 '나' 개념이다. 이 개념이 가장 좁은 범위의 나이다. 다만 내 머릿속 생각 중에서도 도박이나 마약을 원하는 것과 같이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욕구들은 '나'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범위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그다음은 프로이트가 얘기했던 에고, 이드, 슈퍼에고와 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심리적인 모든 영역을 '나'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 수준은 페르소나가 아닌 '자아' 단계로 지칭한다. 내 머릿속 부정적인 생각조차도 '나'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인다. '내려놓기'라든지 '지금 여기'와 같은 마음 챙김이 서서히 시작되는 단계이다.


여기를 넘어서면 나의 몸까지 '나'로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몸을 나로 인식한다는 것은 유심론을 넘어 유물론으로 한 발짝 전진한다는 뜻이다. 보통은 정신적인 '나'를 생각하지 물리적인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나'가 진정한 '나'로 포함된다는 것은 마음 챙김을 넘어 몸챙김을 한다는 뜻이다. 몸의 문제는 분명 마음에 여파를 미치고 그 반대방향도 마찬가지다. 공황장애 또는 불안장애와 같은 수많은 이상심리 현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정신건강의학과로 몰려든다. 유한한 몸을 '나'라고 인정한다면 사후세계나 내세와 같은 개념이 맞는지에 대한 예상치 못한 의문이 들게 된다. 이 단계를 전유기체 또는 켄타우로스 단계라고 한다.


계속 가면 정말 한도 끝도 없는데. 다음 단계는 초개아 단계이다. 내 몸의 범위를 넘어 나의 주변환경을 '나'라는 것과 동일시한다. 포스팅 맨 앞에서 얘기했듯이 사람의 피부 경계면 안과 밖은 분자나 원자 레벨에서는 깨끗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구분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극단적으로 하다 보면 내 주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실체들까지 '나'의 구성요소로 볼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가족'이다. 내 부모자식을 '나'의 일부로 본다거나, 좀 더 다른 예를 들자면 '캣맘'의 경우 길고양이를 자기의 일부로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열성적인 환경운동가들 역시 우리의 자연환경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제가 수면 아래에 깔려있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합일의식' 단계이다. 명상 쪽에서는 이 단계에서 초월체험이 발생하면서 이 단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얘기한다. 필자 역시 이 경험이 없어서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으나 문언적으로만 해석하면 범우주 전체 또는 이 세상 전부와 나를 동일시하는 관점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거두들이 이런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이 얘기는 추후에 또 다뤄 볼 예정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런 생각을 범신론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켄 윌버는 종교가가 아니다. 초월심리학 관점에서 '자아' 또는 '나'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를 논했을 뿐 신이 있다 없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경계에서 생기는 갈등


지금 우리는 '나' 또는 '자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얘기 중이다. '무경계'에서 제시하고 있듯 '나'로 인식하는 범위에 대한 솔루션도, 또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인간의 모든 심리적 갈등은 경계에서 시작된다.'는 명제다. 범위를 나눈 것도 탁월한 통찰이지만, 갈등의 발생지점이 경계선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혜안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좁은 범위의 페르소나 단계를 보자. 이 단계는 가장 범위가 좁다. 다시 말해 자신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영혼 딱 그것만 '나'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외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 심지어 내 몸조차도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나'와 '나'가 아닌 것과의 경계는 가장 넓고 길다고 봐야 된다. 내가 가장 작은 범위에 존재하니까 내가 아닌 것은 가장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국가를 나누는 국경선으로 따지면 가장 긴 경계선을 가진다.


켄 윌버른 이 경계선에서 모든 심리적 갈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 머릿 속이지만 진정한 나의 외부에 있는 더러운 욕망과의 경계에서 고통이 생긴다. 경계면 안과 밖이 서로 이질적이기 때문에 맞부딪히면 싫은 것이다. 만일 나의 몸까지를 나로 인식하는 전유기체 단계라면 내 몸은 잘 챙기고 있겠으나, 도롱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깊은 산 지하를 관통하는 터널공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경계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갈등이 벌어지지 않는 단계가 '합일의식' 단계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합일의식' 단계에서는 이 우주가 나와 동일하다. 거꾸로 말해서 나와 외부의 경계선이 없다. 나의 내외부 사이에 이질적인 것이 없다.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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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의 핵심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진득하게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젊은 켄 윌버는 동서양의 사상들을 섭렵하고 융합적 통찰에 눈을 뜬 다음 ⌜의식의 스펙트럼⌟(범양사, 2006)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이 책이 너무 난해하여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쉬운 요약본으로 내놓은 책이 바로 이 ⌜무경계⌟ (정신세계사, 2023)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요약본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예습은 오늘 포스팅 초반에 김용옥 선생과 관련한 얘기들이다. 그것이 이해된다면 무경계는 술술 풀려나갈 수 있다고 본다.



AI 에이전트의 자아 경계


최근 한 달간 필자의 포스팅은 '자아 ego'라고 하는 인간 특유의 개념을 만약 인공지능에게 인위적으로 심어준다면 어떤 이슈들이 있는지를 짚어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정말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좀 색다른 방식으로 되돌아보면서 좋은 아이디어나 깨달음의 계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주 포스팅에서 밝혔던 '다중 에이전트 기반 사회 시뮬레이션(Multi-Agent Societal Simulation)'이라는 실험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사고실험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실험해 볼 것은 넘쳐나는데..


그 실험에서 인간 자아에 해당되는 전산적인 모델은 Altera.ai 팀이 자체 개발한 PIANO 아키텍처란 것이었다. 이 모델의 자아의식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켄 윌버의 무경계 관점으로 본다면 어디에 해당될까? 지난주 포스팅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자신의 상태와 행동결과..' 그리고 '타인의 감정과 행동을..'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험에 등장하는 천 명이 넘는 AI 에이전트들 중에서 특정한 에이전트 하나를 '자아' 하나로 본 것이다. 이건 페르소나 단계 / 자아 단계 / 전유기체 단계가 합쳐진 것으로 봐야 된다.


내가 만일 후속실험을 한다면 에이전트 하나를 자아 하나로 보는 실험과 모든 에이전트를 합쳐서 하나의 자아로 보는 실험 두 개를 진행해 보고 결과분석을 해 보고 싶다. 과연 인위적으로 합일의식을 부여한 실험에서는 어떤 사회적 발전을 이뤄낼 것이며 어떤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낼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고다마 싯다르타 같은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직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사실 이번에 사회 시뮬레이션 실험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지금도 이와 관련하여 챗GPT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Altera.ai 팀 외에도 여러 랩에서 비슷한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업을 추진하는 연구팀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필자는 이 실험이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조사와 검토를 거쳐 하반기 이후 새롭게 연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상반기 노바 오딧세아 연재는 오늘 포스팅으로 마무리하고, 하반기 적당한 시기를 봐서 사회 시뮬레이션 실험을 포함하여 뇌과학과 BCI (Brain-Computer Interface) 등 새로운 분야에 관한 연재를 재개하고자 한다. 이 역시 필자의 궁극적인 목표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조금씩이나마 힌트를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사회시뮬레이션 #켄윌버 #김용옥 #무경계 #동굴의비유 #플라톤



P.S. 노바 오딧세아 상반기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가 준비 중인 신작 장편소설 집필로 인한 시간부족 문제 때문입니다. 그동안 관심 있게 봐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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