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방콕 장기여행 중 일어난 에피소드 01

by 김유례

3번의 방콕 단기 여행 후 3달 간의 방콕 장기 여행을 결심한 한량. 이전에는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연극배우였고 잡지사 기자였고 방송 작가였으나 잔 우물만 파다가 31살을 맞이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분간 생업 전선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해서 돌연 방콕 장기여행을 결정했다. 까놓고 말하면 도피이나 긍정적인 사고를 발휘해 40세부터 살고 싶은 나라 태국을 미리 공부한다고 과대 포장하는 솜씨를 발휘하는 중.


IMG_8977.jpg 뜨거웠던 여름날 방콕

방콕을 세 번째 방문했을 때였다. 우연한 기회로 태국인 친구 '리'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한국어는 물론 문화에도 익숙한 덕에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수록 나는 턱관절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입도 바싹 말라갔다. '리'의 어마어마한 한국 사랑에 통 입을 다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멤버 이름 하나하나를 읊는가 하면 노래까지 완창 할 정도. 화장품은 대부분 한국 브랜드로 사용 중이며 필요할 땐 약간의 시술을 위해 한국 한 달 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밖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대구이고 음식은 곱창과 막창을 일등으로 꼽은 것도 놀라웠지만 사실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건 이 한마디였다.


나는 겨울을 좋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그 문장을 떠올렸다. 애초에 별 것 아닌 일로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한몫했다. '리'는 태국인이다. 태국은 건기와 우기로 나뉠 뿐 1년 내내 더운 동남아 지역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태국은 벗어나고 싶은 곳인가? 그는 부모에게든 신에게든 그의 태생을 원망할까? 정작 한국인인 나는 태국의 따뜻한 날씨를, 김치찌개보단 똠양꿍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신이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이후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의 말을 곱씹었고 다행히 두 가지 결론을 얻어 그 문장에서 벗어날 수었다.


첫째, 나는 확실히 좀 뒤떨어진다.

겨울에 태어난 내가 여름을 좋아하듯 '리'가 겨울을 좋아하는 것 또한 개인의 취향이다. 그저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 이를 듣는 내가 스스로 '태국인'이라는 단어를 붙인 셈. 이 불필요한 수식어는 순식간에 문장을 한정적이고 불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쉽게 말해 나는 편협한 생각으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다. 한 존재의 출생, 국적 등 타고난 것들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그의 기초, 터, 초석일 뿐인 것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그는 어떠한 공간도 담아낼 수 있다.


둘째, '동경'은 '좌절'이 아니다.

저마다 마음속에 바라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우리가 완벽히 소유할 수 없고 차지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충분히 삶에 원동력을 불어넣는 좋은 계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각자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갖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어떤 부정적인 것도 아닌 일이다. 어쩌면 본성대로 스스로의 필요를 채우고자 태국과 한국이라는 동경의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IMG_5427.jpg 리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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