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여행에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갖다
아마 프롬퐁 역에 있는 엠퀴티어 백화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간편하게 입을 티셔츠를 사러 H&M 매장에 들렸다가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매장 한쪽에 디스플레이된 베이지 색 트렌치코트였는데 순간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한국의 가을바람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치앙마이 쪽은 늘 시원한 날씨를 유지하고 방콕도 연말이면 날이 꽤 쌀쌀해진다고는 하지만 내가 여행할 당시는 우기였던 터라 바람을 따라 온종일 거리를 나뒹구는 낙엽이라든지 흙냄새가 가득 번진 공기 냄새 같은 가을의 사소한 풍경은 기대할 수 없었다.
반대로 태국에서만 목격한 몇 가지 독특한 풍경도 있다. 예를 들어 태국의 지상철(BTS)·지하철(MRT)에는 우리나라 지하철과 달리 짐을 올려둘 선반이 없다. 머리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태국인들에게 친근함의 표시로 머리 부위를 쓰다듬는 것은 다소 무례한 행동인데 때문에 머리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는 것 또한 금기시되는 것 같다. 또한 태국인들은 식사를 할 때 숟가락이나 포크 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지 않는다. 처음엔 식기 도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냅킨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그밖에 우리나라의 어버이 날과 달리 태국은 Mother’s day(어머니의 날), Father’s day(아버지의 날)가 나뉘어 있는 점, 영화나 공연을 보기 전엔 다 같이 일어나 태국 왕의 찬가 영상을 보며 경의를 표하는 것도 내겐 낯선 문화였다. 스테이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테이블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태국 클럽도 생소했지만 다행히 음악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태국 방콕이라는 이색적인 장소에서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특히 태국은 우리나라만큼이나 음식에 다양한 젓갈을 사용해서 그때그때 아쉬운 대로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걸그룹 마마무의 화사가 MBC <나 혼자 산다>에서 간장게장 붐을 일으켰던 날 나는 집에서 얌뿌마, 뿌동 남 쁘라 등 태국식 간장게장과 꿍쉐 남빠(새우장)를 배달시켜 먹었다. 이밖에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땐 깽솜이나 똠얌꿍을, 얼큰한 생선찌개가 먹고 싶은 날엔 우리나라 매운탕과 비슷한 빠둑을 즐겨 먹었다.
이따금 한식당에 가서 떡볶이, 비빔냉면, 돌솥비빔밥을 먹고 매주 토요일엔 폴댄스 수업을, 주일엔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한국에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냈지만 역시 그리움이란 쉬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밥 짓는 냄새가 날 때, 함께 방콕으로 여행 온 가족들의 행복한 미소를 볼 때, 카페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있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힐 때 나는 종종 슬펐다. 하지만 딱히 좌절스럽진 않았다. 서툴거나 친숙한 것들 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은 물론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 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더욱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이상 우유부단해서, 눈치를 보느라 어물쩡거릴 일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혹 절대로 상충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겁먹지 않아도 될 이유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