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정조이산, 조선최초 군주혁명가(수원화성)



정조이산, 그가 세계최초군주혁명가라는 것 수원화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수원화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를 만들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즉, 개방을 통해 저절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 조선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지정문화재인데 지금부터 이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 하려고 한다. 



⑥ 조선 창조를 위한 추진기 수원화성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죠? 수원화성입니다. 수원화성 가보신 분 계세요? 한 분, 두 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가보셨군요. 이런 데는 가보면 좋죠. 가서 조상님들의 기개도 느끼고 우리나라 건축양식도 공부하고 건축하는 분들이 있다면 영감을 얻을 수도 있고 말예요. 혹시 수원화성에 대해 궁금한 거 있으신 분? 화성이면 화성이지 왜 수원화성이냐고요? 그건 정조 임금이 성을 만들 때 “이 고을의 이름을 화성이라고 해라.” 라고 명했대요. 그래서 본디 고을 이름이 수원이었는데 화성이 되었죠. 그리고 지금은 다시 수원이라고 부르고요. 그래서 다 같이 합쳐서 수원화성이라고 부른답니다. 또 수원화성 하면 떠오르는 거 있나요? 네, 그렇죠.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잖아요.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해요. 화성이 세계문화 유산 가운데 원본이 아닌 것으로 등재된 특별한 경우라는데 그 이유가 화성의 여러 시절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파괴되었대요. 장안문 같은 경우는 윗부분이 반 이상 손실되었고 포루와 공심돈으로 불리던 성벽 건축물도 온전한 게 없었대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5년부터 시작된 복원공사의 결과라고 합니다.      

수원화성을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수원화성을 찾았대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화성이 원본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관계자들이 물었죠.      


“아니 무슨 생각으로 원본이 아닌 것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겁니까?” 그때 우리 측에서 제시한 것이 『화성성역의궤』였다고 해요. 이 책은 화성 건축에 관한 일종의 공사기록서로서 한국건축사상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지닌 보고서랍니다. 『화성성역의궤』를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이 한 책들이 시중에 나왔는데 여러분도 보시길 바랍니다. 기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완전판’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는 시설물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圖說)이 있어서 화성을 완벽하게 복원 가능했다고 하는군요. 그제야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이 정도면 허락할 만하다.’ 해서 등재를 허락했답니다.



       

수원화성을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최초로 원본이 아닌데도 유네스코 지정 등재유산이 되었지. 또 10년을 예상했던 공사기간을 2년 4개월 만에 끝낸 점도 그렇지 그리고 조선 역사상 ‘수원화성’ 같은 건축양식은 전무후무한 존재인 것도요. 오죽하면 ‘수원화성’을 한국건축사상 돌연변이라고 평가하겠습니까? 여러분, 수원화성 함께 여행할 준비 되셨습니까? 목적 없이 하는 여행은 재미가 없죠. 우리는 수원화성을 둘러싼 세 가지 미스터리를 안고 여행을 하니까 스릴도 넘치고 긴장도 되는군요.      

정조 이산은 화성을 만들 때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흔히 갑자년 구상이라고 합니다. 즉,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 후 1805년 갑자년이 되는 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아들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노론 벽파에서 내세우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자신의 아들이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한다면 자신은 할아버지, 영조와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 아니니까 선왕에 대한 충(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죠. 또 그렇게 된다면 위태로운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다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화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신분 고하를 떠나 하나가 되는 신개념의 도시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정조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할까요?      

수원화성은 어느 날 뚝 떨어진 사과가 아닙니다. 정조 이산이 수원화성을 만들기까지는 여러 해에 걸친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즉위한 해인 1776년 규장각을 짓도록 명하죠. 신하들은 처음에 규장각을 그저 왕실도서관쯤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이곳에서 정조 이산은 당색에 물들지 않은 젊은 관료들을 끌어들이고 서얼들도 규장각에 기용하여 능력 위주의 지도자 양성 학교를 만듭니다. 그다음 한 일은 조선왕실의 무(武)를 갖추는 일. 신변경호를 구실로 장용위를 창설한 다음 차츰 병력을 늘려나가더니 나중엔 장용영이란 큰 규모의 친위부대를 만들었죠. 그다음엔 신해통공과 상언격쟁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또 탕평책을 내세워 노론, 소론, 남인을 골고루 등용합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힘으로 합쳐 새로운 조선의 ‘프로토타입(prototype:원형, 제작물의 기본형)’을 만들 차례입니다.                             



조선왕조 최다 행행(幸行)을 한 왕



정조의 원행과 관련해서는 『원행정례(園行定例)』라는 책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긴 1789년 이후 1800년까지의 원행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왕의 명령, 어가를 따라간 신하들의 배치와 복장, 행차에 소요된 비용, 배다리 놓는 법, 군사훈련 방법, 한양에서 현륭원에 이르기까지의 도로상황, 수행원 수, 말, 화성 행궁 그리고 문무과 시험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정조는 조선왕조 최다 행행(幸行)을 한 왕이다. 행행이란 왕의 궁 밖 나들이를 지칭하는 말로, 재위 24년간 일 년 평균 3회에 걸쳐 행행을 했다 한다. 물론 유교의 최고 덕목인 효를 이렇게 아버지 묘소에 참배함으로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에 그가 처리한 격쟁과 상언의 횟수가 3,355건에 이른다.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고 싶었던 정조  



지금 봐도 혁신적인 일이었을 진대 당시 화성은 한 마디로 문화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실 때 이를 비밀리에 부쳤던 것처럼 화성건설 또한 대신들의 만만치 않은 반발을 가져왔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해냈고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나라를 비상시키고자 했던 의지도 강화되었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으니 이 흐름에 동참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과거의 영광으로 살아가던 노론 벽파들은 끝내 과거를 선택하고 만다. 처음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선택 때문에 후손들이 안 좋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습도 미래의 후손들이 보면 원통하고 분통 터지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상에서의 간단한 습관도 고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정조가 그토록 함께 가자고 외쳤는데도 듣지 않던 무리들과 다른 게 있을까?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한 번쯤 도약할 시기가 오지요. 도약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제껏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시기라고 할 수 있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을 한 곳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점에 집중하고 그곳에 나의 역량을 결집한 다음 모든 것을 쏟아부을 때 나도 모르게 주어지는 것이 도약이라고 하더군요. 수련하다가 가끔 찾아오는 무심(無心)의 경지라고 할 수도 있고, 언젠가 김연아 선수의 인터뷰에서 보았던 ‘무중력 상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피겨스케이팅을 연습하다 보면 무결점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 어떤 경우에는 연기를 펼치다가 가끔 무중력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대로 연기를 펼치고 있는데 누군가 위에서 당기는 것 같았다고요. 여러분 상상이 잘 안 가시죠? 하지만 비슷한 상태를 평범한 우리들이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그 얘긴 지금 하면 재미없으니까 좀 있다 하기로 하고요, 정조 이산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정조 仙인께서 언제부터 수원화성을 계획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즉위 초창기부터 이 한 점을 위해 달려오신 것은 분명합니다. 꼭 수원화성이 아니더라도 다른 식으로라도 펼쳐온 일들을 마무리를 지으셨겠지만 당시에는 ‘수원화성’이라는 형태로 집약된 거죠. 아까 수원화성의 공사 예측기간이 10년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제 공사기간은 2년 4개월이었죠.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그것이 신바람의 힘, 한마음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조 이산은 백성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랬기에 화성축조의 모든 과정은 왕의 일방적인 명령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닌 민심을 얻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789년 7월, 수원에 사는 백성들은 이곳에 지을 사도세자의 묘 이장 건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죠. 왕의 명령이니 어쩌겠습니까? 이사 가라면 가야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도세자의 묘를 세워본들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백성들의 원한만 살 뿐이지요. 그래서 이주민들이 살 공간을 먼저 마련해둡니다. 그다음에 이주비 명목으로 초가집은 6냥, 저택은 많게는 집값 400냥에 이주비 120냥을 쥐어주지요. 아버지 묘소를 이장한 정조 이산. 이제는 백성들이 살아갈 도시를 만들 차례입니다.      


1794년 1월 15일 화성을 짓기 전 정조 이산은 수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 고을 터를 보았습니다. 성을 쌓을 터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을 쌓는 것은 억만년의 대계를 위해서이니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화합이 중요하네. 근데 성터의 깃발 세운 곳을 보니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할 집들이 있더구나. 이미 지은 집을 성을 쌓는다고 내보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화가 아니다. 또 성을 쌓을 터의 남쪽과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터를 좀 더 넓히는 것이 어떠한가? 화산과 유천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조선의 억만년 태평시대를 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으로 하고 내천 자의 형태를 따라 해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민가도 성안에 들여야 할 것이다.”      


성터를 쌓기 위해 북쪽에 위치한 인가를 철거하는 의논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며 차라리 성의 모양을 원형에서 타원형 모양으로 바꾸자고 제의하죠. 정조 이산이 화성에 기울인 정성이 어느 정도냐 하면 수원화성을 짓는 그해만 해도 몇 번이나 화성을 방문합니다. 또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가 수많은 서적을 읽고 신하들의 의견을 참고한 다음 최선의 선택을 하죠.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분명합니다. 유형원 자신이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함을 주장했고, 정조 이산은 이 책을 읽고 “백 년 전에 마치 오늘날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했다.”라고 평합니다. 


출처: 세계최초군주혁명가, 정조이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68134     



작가의 이전글 한류가 대세는 대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