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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이산: 새 시대를 열어갈 도시를 만들다 (수원화성)



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성터를 쌓기 위해 북쪽에 위치한 인가를 철거하는 의논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며 차라리 성의 모양을 원형에서 타원형 모양으로 바꾸자고 제의하죠. 정조 이산이 화성에 기울인 정성이 어느 정도냐 하면 수원화성을 짓는 그해만 해도 몇 번이나 화성을 방문합니다. 또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가 수많은 서적을 읽고 신하들의 의견을 참고한 다음 최선의 선택을 하죠.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분명합니다. 유형원 자신이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함을 주장했고, 정조 이산은 이 책을 읽고 “백 년 전에 마치 오늘날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했다.”라고 평합니다.



수원화성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지요.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는 1790년 정조 이산의 명이 있자 화성의 설계를 맡습니다. 여태껏 조선에 축성되었던 여러 성을 살펴보고 중국 성곽의 강점을 연구하고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까지 탐독하면서 어떤 성곽을 만들 것인지 구상합니다. 그리고 2년 후 성곽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획안과 설계도를 담은 『성설(城說)』을 정조 이산에게 제출합니다. 정약용의 성설에 만족한 정조 이산은 이번엔 중국의 과학서적인 『기기도설』을 내려 기중기를 개발하게 합니다. 『기기도설』은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인 요한 테렌츠가 물리학의 기초와 도르래를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를 그림과 함께 소개한 책자입니다. 다산은 그 책자를 통해 물리학의 개념을 이해한 다음 도르래의 모형을 제작하여 실험을 거듭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라고 하면 하늘 천 따지 경전만 외우고 있을 것 같은데 공학실험까지 하는 선비라니 상상이 잘 안 가시죠?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한 끝에 다산은 성곽축조에 쓸 만한 기중기를 만듭니다. 그 결과물을 기중도설을 통해 글과 그림으로 남겼고요.





화성축조의 기획은 정조 이산이 맡고, 설계는 다산 정약용, 축성 책임자는 채제공, 현장 책임자는 화성 유수 조심태가 맡아 1794년 정월 드디어 화성 축성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심태는 1789년 사도세자 묘 이장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은 수원부사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화성 성곽 공사 책임자가 된 것이죠. 축성 공사는 다산 정약용의 설계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공사까지 병행되었으니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던 화성은 졸지에 시끌벅적한 도시가 되었죠. 화성 축조 시 인화(人化)를 중요시했던 정조 이산은 축성 사업이 백성들의 고혈을 빼는 사업이 아닌 상생(相生)의 사업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성 축성 시 조선 최초로 부역이 아닌 임금 노동제를 실시합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들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임금 노동제를 실시했다고 하는데 저는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당시 부역이란 지금 국민들이 세금 내는 것처럼 백성의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돈을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되는 일이 아니죠. 당연히 관리들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내탕금(왕의 사비)을 털어서라도 공사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줍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몇백 년을 앞서 생각하는 현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성은 상공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입니다. 정조 이산은 수원화성을 조선의 물류 허브로 만들고 싶었던 거죠. 앞으로의 세상은 유통이 중요해질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성축조사업을 일종의 생산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던 것이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정조 이산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직 서 있지 않으니까 내탕금을 쓰면서 시범을 보입니다.



하여튼 백성들은 그전까지 의무로 하던 일을 돈을 주니까 신나서 공사축성에 참여합니다. 게다가 기술이 뛰어나면 뛰어난 만큼 대접을 해주니까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죠.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 부역이라면 화성 축성은 나를 먹여 살리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또 공사가 있으면 주변에 상인들이 모여들지 않습니까?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필요한 물품도 대고, 먹을거리도 팔고 그렇게 여러 사람을 살리는 공사로 거듭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794년 여름에 왕은 덥다고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더위를 쫓는 환약인 ‘척서단’을 하사합니다. 다음 해 겨울에는 장인들에게 모자와 무명 1필을 하사하죠. 또 화성공사현장에 갈 때마다 인부들에게 음식을 내립니다. 10년 만에 가능한 공사가 2년 4개월 만에 끝이 났다는 것은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 다산 정약용이 때맞춰 개발한 첨단 기계 덕분에 건축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죠. 이것이 신바람의 힘 또 한마음의 힘 아닐까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신이나면 지칠 줄 모르고 일하게 되잖아요.



화성축성의 의의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화성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조선의 다른 성곽들과는 모습이 다르죠. 보통 조선의 성곽은 산성이 대부분이죠. 산성의 재질은 뭐로 되어 있죠? 네, 화강암입니다. 그런데 화성은 기존의 성들과 재료가 다릅니다. 기존에는 자연석이나 화강암을 많이 쓰죠. 그런데 화성은 돌과 벽돌을 섞은 형태의 성벽입니다. 또 이곳에 가면 다양한 형태의 목조건물과 벽돌 시설이 있죠. 예를 들어 공심돈(화성에는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두 개가 있다) 건물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입니다.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로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또 ‘속이 빈’이라는 의미를 가진 공심돈건물은 내부가 텅 비어 있습니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을 보세요. 군사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미적으로도 참 아름답죠. 달밤에 우뚝 솟은 방화수류정을 보고 있노라면 술 한 잔 띄워놓고 시를 짓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성을 건축박물관이라고도 평가한다더군요. 화성축성에 동원된 인원이 22직종 총 1,840명의 장인이었다고 하니 조선 후기 건축의 꽃이라 할 만합니다.



화성이 기존 조선의 도시와 다른 점은 자립형 도시였다는 데 있습니다. 방어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를 만들었고 또 그 도시가 독립적으로 기능이 가능했죠. 이 강의를 듣는 여러분이 주목해야 할 부분도 이 점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사는 곳을 봅시다. 우리가 이제껏 나고 자랐던 곳, 나이가 좀 든 세대들은 아니겠지만 저와 비슷한 세대만 해도 아스팔트 키드(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를 일컫는 말)가 많죠. 요즘은 아이들에게 채소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으면 ‘슈퍼’라고 대답하는 애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현대 도시의 특성이 어떻습니까? 그 자체로 자립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지요. 먹을 것은 주변의 농가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하죠. 공산품도 물론 도시 내에서 생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공급된 것을 들여오죠. 만약 도시가 그 자체로 고립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당장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가끔 자연재해로 고립된 지역 소식을 들으면 헬기로 물품을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것을 보죠? 오늘날은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뚜렷합니다. 문화, 예술, 정치 분야는 도시에 몰려 있고, 1, 2차 산업은 시골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18세기에 만들었던 화성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가능한 구조입니다.



일단 스스로 방어가 가능합니다. 성곽이니까요. 성문만 닫으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요새가 됩니다. 또 농업기반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화성을 지을 때 사람들은 신도시 백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화성의 둔전을 개간했습니다. 원래 둔전이란 나라에서 군사비용을 충당하거나 지방관청을 운영하기 위한 경비 마련을 위해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화성에선 둔전을 백성들의 농사터전으로 탈바꿈시키죠. 농지가 확보되었으니 그다음 중요한 것은 농업용수입니다. 비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선왕의 중요한 업무 중 비를 내리기 위해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이 있었죠. 그런데 정조 이산은 ‘물이 없다면 물을 만들어내라!’ 저수지 공사를 벌여 1796년 5월에는 만석거를 1798년에는 만년제와 축만제를 조성합니다.



이것으로 백성이 먹을 양식이 해결되었죠. 농업용수를 확보한 다음 그가 한 일을 수원화성을 상공업 중심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일입니다. 아까 정조 이산이 수원화성을 조선의 물류허브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는 화성행궁 앞에 십자로를 만듭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그냥 오라고 해서는 안 올 테니까 이곳의 상인들에게 인삼과 모자 판매권을 줍니다. 그러자 십자로 주변에는 상업지대가 형성되고, 상업지대가 형성되면서 십자로 뒤편으로 자연스레 민가가 형성되죠.


십자로를 만들면서 교통이 발달하고 길이 사방팔방으로 통합니다. 즉, 모든 방향으로 열린 도시입니다. 성문을 닫았을 때는 자체적으로 자립이 가능한 구조이면서 성문을 열면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도시입니다. 자유자재로 소통하고 자립이 가능한 구조이지요.


작가's note:


여러분, 개혁은 한꺼번에,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시간에 걸쳐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꺠어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것이 서로 전달전달 되어 불꽃처럼 번지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한류가 있기 까지 오랜 시간 동안 한류가 축적되었던 것 처럼요.


정조이산, 당대에 개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정성이 모이고 모여

결국에는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반드시 생육을 낳지요. 

우리나라 철학은 상생...을 중요시 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삶은 상생보단 소멸로 이어지는 삶이었던 것 같아요.

자연의 원리 

세상의 순리에 따르는 그러한 삶을 나는 못살았을지라도

나의 후손은 그 다음 후손을 그러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조선시대를 개혁하려고 한 정조이산, 그의 마음을 잊지 맙시다. 






출처: 세계최초군주혁명가, 정조이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746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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