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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 Dec 03. 2018

아이들의 꿈을 잡아간 무허가 해병대 캠프

 2013년 여름, 충남 태안의 사설 해병대 캠프에 공주사대부고 학생들 198명이 3일간의 일정으로 참가 중이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 한 이른 초저녁이었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 20여 명이 바다에 들어갔다. 서로를 의지 한 채 교관의 지시에 따라 먼 바다 쪽으로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물이 어느새 학생들의 허리춤까지 올랐다. 붉은 해병대 모자를 쓴 교관은 더욱 거칠게 학생들을 독려했다. 앞 선에 학생들이 갑자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갯골이었다. 구명조끼도 없는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렸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허우적댔다. 사태를 파악한 교관들이 뒤늦게 아이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5명이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데스크의 다급한 전화였다. 무얼 넣었는지도 모르는 급하게 챙긴 출장 짐을 짊어지고 태안으로 출발했다. 내려가는 동안 해안경비대, 소방서 구급대와 통화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들에게 큰일이 벌어졌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태안 바닷가를 수색하는 구조대원들과 해경, 사설 잠수부들>

 

 도착한 현장에는 헬기와 각종 수색장비를 동원한 수색작업이 한창이었다. 실종자 학부모들은 발을 구르며 바다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은 취재진이나 수색작업을 하는 인원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실종 12시간 만인 오전 6시 50분경 모두의 염원과는 달리 학생 두 명의 시신이 물속에서 발견됐다. 간조로 바닷물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뭍에서 불과 6~7미터 지점에서 나란히 발견됐다. 실종자 시신이 발견됐다는 해경의 무전과 함께 구급차와 취재진이 일제히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시신은 하얀 천에 덮인 채 뭍을 밟았다. 하얗게 물에 불은 시신의 발이 언뜻 보였다. 지켜보던 부모는 자신의 아들임을 직관했다. 구급차로 옮겨가는 시신을 붙잡고 백사장 한복판에서 오열했다. 학교에서 주최하고 꽤나 큰 단체에서 운영하는 해병대 캠프라 했다. 교사들도 동행하고 학생들도 여럿이 가는 터라 안심하고 자식을 맡겼다. 건강하고 맑던 아이가 12시간 만에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정성스레 입혀준 옷 그대로, 아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주먹을 굳게 쥔 채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뭍으로 올라 온 시신을 구급차로 운송하는 모습을 취재하는 필자 -연합뉴스->



 모래사장을 50미터 가까이 가로질러 시신은 구급차에 실렸고 병원으로 향했다. 카메라를 든 채 모래사장을 정신없이 전력질주로 가로지르며 취재를 했다. 숨은 차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명을 보냈다.


 시신이 뭍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발견되자 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남은 부모들도 혼절하며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오후가 되고 추가로 수색대원과 자원봉사자들까지 합쳐져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모래사장 인근부터 인간띠를 만들어 훑어가며 아이들을 찾았다. 나는 자원봉사로 참여한 잠수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가 근해 수색을 취재했다. 햇살이 따가웠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인간띠를 만들어 아이들을 수색하는 수색대원들>



 오후 5시경, 이번에는 깊은 바다 쪽 해경 보트로부터 손짓이 왔다. 실종 24시간 만이었다. 5분 간격으로 나란히 두 명의 학생이 발견됐다. 유족들이 옷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르고 바닷물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어갔다. 취재진도 함께 들어갔다. 부모는 이내 자신의 자식인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유족들은 모래사장에 구르며 오열했다. 왼쪽 눈을 질끈 감고 뷰파인더 속으로 오른쪽 눈을 파묻었다. 괴로운 취재가 이어졌다. 아이들을 실은 구급차가 또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2시간 뒤 이병학(17)군이 친구들을 따라 뭍으로 나왔다. 실종된 지 하루 만에 해병대 캠프 바로 앞바다에서 5명의 학생들이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해병대 캠프 교관들의 자격 문제와 교사들의 사건 당시 행적, 아이들은 왜 당시에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나에 대한 취재가 이어졌다. 전문 자격증이 없는 사설 캠프 교관들은 심지어 아르바이트생까지 끼어있었다. 경험과 교육이 부족한 교관들에게 아이들의 목숨이 맡겨진 것이다. 취재가 진행될수록 해병대 캠프의 문제점은 낱낱이 드러났다. 아이들을 곁에서 케어했어야 할 교사들은 그 시간에 회식 중이었다. 주변 주민들은 캠프가 사용하는 태안의 그 해안가는 물살이 강하기로 유명하여 그곳에 사설 해병대 캠프 시설이 들어오는 걸 반대했었다고 증언했다. 인재였다.



 
 7월의 내리쬐는 태양이 몸을 달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었을 것이다. 해병대 출신 교관들의 외모는 참으로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바닷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시커먼 바다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어든 아이들을 그대로 삼켰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탓이다. 허망하게 자식을 잃은 유족들이 모래사장에서 그 슬픔에 몸부림친다.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고통스럽다. 다시는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길 바라며, 보는 모두의 가슴속에 새기기 위한 기록이다. 그러나 촬영기자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힘든 시간이다. 뷰파인더로 보이는 피사체가 자꾸만 흐려졌다. 질끈 감은 반대편 눈에 한없이 눈물이 맺혔다. 현장의 기록은 그렇게 가슴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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