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윤가은

무지(無知)를 경계하라

by 재승

솔직히 처음엔 제목이랑 포스터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할 게 없어서 영화나 봐야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극찬들을 하시길래.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관계나 성격 등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이는 '주인'. 몇 년 전, '주인'의 동네에는 아동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 범인이 곧 출소를 하고 다시 동네로 복귀한다는 소식에 방송부인 '수호'는 친구들로부터 성폭행범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에게 부탁하는 '수호'. '주인'은 '수호'가 준비한 유인물을 보고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한다. '주인'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어떤 한 문장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는 문장. '주인'은 이 문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화가 난 '주인'은 '수호'한테 이야기한다, "갑자기 왜 난리인데, 니가 이 문제에 대해 뭘 안다고."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감히 말하지만 올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좋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아이들을 등장시키며─물론 두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연령대는 조금 다르지만─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또한 초반의 불친절함으로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하며 그 효과로 몰입의 깊이를 더한 뒤, 후반에서 그 복선을 절묘하게 회수하는 흥미로운 전개 방식을 두 영화 모두 사용하고 있다. 물론, <세계의 주인>이 <괴물>의 아류작이라거나 그 방식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아이들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도 생각이 났었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눈과 귀를 통해 여과되지 않은 솔직한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식에서.



─ 주인과 태선, 그리고 누리

'태선'은 '주인'의 어머니이고, '누리'는 '수호'의 여동생이다. 영화를 보면서 묘하게 이 셋이 연결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두 성장기에 부모 중 한 명이 없었다는 점이 같고, 영화 안에서 심리적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다. 셋이 연결되었다는 느낌은 연장되어 주인공인 '주인'의 과거를 '누리'로, 미래를 '태선'으로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품게 하기도 했다.


영화든 책이든 등장인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아픔이다. '주인'의 어머니인 '태선'은 만성 복통을 가지고 있다. 또한 '누리'는 팔에 붕대를 하고 목뒤에 멍이 드는 식의 상처들을 가진다. '주인'에게만큼은 그 물리적인 아픔이 딱히 없는데, 의도적인 삭제라고 본다. '주인'이 가진 캐릭터성과 앞으로 이야기할 이 영화의 주장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인'에게 굳이 그것을 설정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친족에 의한 성폭행의 문제를 수면 밖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올려내는 것은 그 범죄의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남겨진 피해자에 관한 것. 영화의 후반에 밝혀지지만 '주인'은 어렸을 때 작은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었다. 이 사실과 세 명의 은근한 연결로 미루어보아 '태선'은 '주인'의 원망의 대상, 그리고 '누리'는 '주인'의 질책의 대상이다.


'누리'는 영화의 첫 등장에서부터 끼고 있는 붕대에 대해서도, 목뒤의 멍에 대해서도, 감기에 대해서도 모두 괜찮다로 일관한다. 유치원과 집을 제외하고는 다니지 않는데 자꾸 상처가 생기는 '누리'를 보며 '수호'는 유치원 원장인 '태선'에게 부탁한다, 왜 그러는지 좀 알아달라고. '태선'은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상처는 흔한 것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수호'는 그 말이 못 미덥기만 하다.


상처가 줄어들지 않고 자꾸만 생겨나자 '수호'는 유치원에 가서 호소하다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태선'은 결국 CCTV를 확인하는데, 화면에 '주인'과 '누리'가 등장한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한 '주인', 그러고는 '누리'의 여기저기를 꼬집는다. 집중하는 '태선'의 앞으로 '누리'가 등장한다. '누리'는 '태선'에게 말한다, 아프냐고. 괜찮다는 말을 하는 '태선'에게 '누리'는 '주인'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태선'을 꼬집는다, 이래도 안 아파?


묘하게 셋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아주 근거가 없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위 장면을 보면서 했다. 정말로 '누리'를 '주인'의 과거로 설정했다면, '태선'은 '누리'에게, 이전에 '주인'에게 그러하였듯─그게 의도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만─무관심했다. 또한 '누리'는 '주인'이 그녀 스스로에게 그러하였듯 괜찮다는 말로 자신에게 무책임했다. 따라서 위에서 말했듯이 '주인'에게 '태선'과 '누리'는 각각 원망과 질책의 대상이다. 둘에게 모두 그러지 말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같은 문장으로 책망과 후회를 동시에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주인'과 '태선', 그리고 '주인'과 '누리' 이렇게 둘이서만 있을 때 등장하는 감정의 표출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뒤에서 더 이야기해 보자. 우선은,


─ 청소

청소에 관한 소재로 빌드업을 하는 것도 꽤나 좋은 부분이었다. '태선'이 회식을 하느라 늦게 들어오는 날에, '주인'은 동생 '해인'과 함께 집 청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는 그저 철든 딸의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는데, '청소'라는 소재는 계속 이어진다.


'주인'이 꾸준히 나가는 봉사 모임이 있는데, 다양한 연령대와 남녀가 섞여 있는 봉사 모임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잡동사니가 가득한 집을 청소하고 있다. 후에 밝혀지는데, 이 모임은 모두 친족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세심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모임의 구성원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표할 만한, 어디 한쪽에 치우친 표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해두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한 연출.


그들이 하는 봉사활동이 청소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 부분이다. 윤가은 감독의 말로는, 원래는 유기견 센터로 봉사를 나가는 것이었다는데 여건상 찍지 못해 청소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안 좋은 경험이 있었더라도 잘 살아나갈 수 있고 남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겠다─뒤에 쓸 '피해자다움' 챕터와 연결된다. 그럼에도 '청소'라는 행위의 의미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면에 남아있을 상처와 아픔을 물리적으로라도 치우는 과정을 통해 '마음속 청소'라는 행위에 투영하려 하지 않았나 싶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세차장 장면도, 어떻게 보면 청소라는 소재의 의미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이 '태선'에게 마구 쏟아내는 장면은 둘이 타고 있는 차가 자동 세차장에 들어가며 시작한다.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그만큼 억눌려있던 감정이 마치 세차장이 차에게 물을 뿌리듯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과, 겉은 청소를 하고 있지만 오히려 물 뿌리는 소리나 큰 솔이 돌아가는 소리에 막혀 내면에 있는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어떤 의미이든,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청소'라는 소재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 피해자다움

영화 러닝타임 내내 '주인'은 학교에서 총 4번의 쪽지를 받는다. 출처는 명확하지 않은데,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수호'와 성폭행범 복귀 반대 서명을 거절하는 '주인'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부터 그녀는 쪽지를 받는다. 내용은 '주인'이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변 친구들이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어? //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 너의 모습은 뭐야, 대충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중간에는, 성폭행을 당했던 사람들이 마음속에 아픔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데, 괜찮으니 밖으로 표현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생각했다. '누리'가 '태선'에게 "이래도 안 아파?"라고 얘기했던 것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제발 얘기해, 아프다고 말하라고,라며 부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하지만 영화가 던지는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피해자다움. '-다움'이란 단어가 요즘 사회에서는 꽤나 경계되며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의도치 않게 큰 실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거리를 소개할 때 '주인'이 민감하게 반응했던 문장은,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었다. 경각심을 깨워주기 위한 말이겠지만, 저 문장이야말로 '피해자다움'을 조장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아프고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도 맞는데, 그런 인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쉽게 재단하고 편견을 갖는다. 선의로 하는 행동일지라도, 그들에게 슬픔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렇게 잘 지낼 수 있어?


'주인'에게 외부의 물리적인 아픔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일을 겪었을지라도 잘 살아내는 주인공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태선'과 '누리'로 등장한, 다른 시간선의 자신에게뿐이다. 그 외의 '주인'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데, 끝끝내 무너지지 않는 주인공을 설정한 것에서 견고한 윤가은 감독의 생각이 보이는 듯하다.


피해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은, 트라우마이거나 실제로 남은 상처겠지만, 그와 동등하게 사람들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다. 선의로 하는 배려, 말, 혹은 친절 등이 그들에게는 일반인과 본인들을 나누는 선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럴수록 그들은 자신들을 더 그 말에 맞추려 한다. 더 슬프게, 더 우울하게. 마지막 쪽지는 이외의 것들과 다르게 내레이션으로 등장한다. 한 문장 문장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나도 너와 똑같아,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말할 거야, 와 같은 말들이 적힌 쪽지를. 그들은 얼마나 많은 친절과 맞서 싸우고 있을까.


경계해야 되는 것은 악의뿐만이 아니다. 무지(無知)이다. 그게 좋은 마음이든 아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