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관성을 이겨내는 희망의 가능성
한강의 초기작이라며,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추천받은 책이다. 199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간 한강 작가가 쓴 짧은 소설들이 모여있는 단편집.
총 6개의 단편이 묶여있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책의 첫인상은 훈련소에서 읽었던 김승옥 작가의 소설집 <무진기행>과 비슷하다는 감상이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물론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지만─자연스레 김승옥 작가가 생각이 나게 되는데, 그건 내가 그들의 작품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책이 <무진기행>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사람들이 김승옥 작가가 대단하다고 하니까 나 스스로 이 책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감히 짐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수의 사랑>과 <무진기행>이 닮아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가장 크게는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문장에는 한기가 서려있다. 내가 <여수의 사랑>을 읽은 시점이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이어서 그렇게 느꼈다고도 생각해봤지만, <무진기행>을 읽었을 당시는 혹서기였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던 한여름이었다. 그들의 단편들 속에 겨울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겠다고도 생각해 봤지만, 문장에 한기가 서려있다는 말은 단순히 작품의 배경을 지배하는 날씨가 춥다는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작품의 배경이 모두 겨울인 것 또한 아니니까.
외로움이었다. 문장 사이사이에 깊게 밴 외로움의 냄새가 그들의 작품에서 진동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검은색에 가까운 시퍼런 바다 같기도 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끔 거센 눈발이 내리는 깊은 산속 같기도 하다. 한강 작가가 <여수의 사랑>을 포함한 6개의 단편에서 적어내는 문장들의 거의 모두에서 그 장면이 생각난다. 막막하게, 어둠에 잠식되는 듯한 느낌.
단편집을 보고 서평을 쓸 때면 항상 그중 하나의 작품을 골라 감상평을 적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품 하나의 감상평을 적어야 한다는 건 더 많은 힘을 들인다는 이야기이다. 6개의 단편들 중 하나를 고르고, 다시 읽으면서 어떤 내용을 글에 담을지 생각하며, 그 내용을 최대한 조리 있게 써야 한다는 말이니까. 솔직하게는, 더 많은 힘을 들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김승옥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글은 자칫 집중력을 놓치면 읽고 있던 그 문장에서 바로 길을 잃어버린다. 쓰는 단어가 어려워서도 있겠지만, 심도 있는 다양한 수식어로 인해 길어진 문장은 마치 미로와 같다고 생각했다. 미로를 하나씩 풀고 마침내 끝에 도달하면, 막상 내가 읽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빠져있다. 단순히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번역하는 과정에서 힘을 너무나 써버려 짧은 호흡의 글임에도 해석이라는 마지막 공정을 거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막연하게 흐릿한 글씨들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예를 들어, <어둠의 사육제>에서, '영진'과 '인숙' 사이의 일, 그로 인해 파생된 베란다에서의 거주라든가, 얼룩덜룩 암고양이의 끔찍한 신음 소리라든가, '명환'의 사정과 그가 '영진'에게 협박식으로 건네는 제안.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결말과 '영진'의 미래 등등.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에 해당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책의 전체적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추상적이게 되어버린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겠다.
잘 만든 작품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영화나 책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점점 더 깊게 하게 되는 고민이다. 사람들이 해당 작품을 어떻게 평가를 하든 그거랑 상관없이, 나의 무의식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나 생각되는 건, 작품이 가지는 간접성이다. 미술이든, 영화든, 책이든 간에 모든 작품들은 반드시 목표가 있다. 창작자가 가진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는 목표.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그 과정이 작품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곳에서의 간접성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순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인물의 대사나 텍스트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직접적이지 않은 무엇을 통해서 얼마나 잘 간접적으로 설명하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집 <여수의 사랑>은 성공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평범하다'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인간으로서 평범하다는 의미가, 그러니까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다는 의미가, 각자가 말 못 할 상처와 결함 그리고 어느 정도의 뒤틀림과 히스테리를 가진 것이라면, 각 단편들의 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평범이라는 범주 안에서 어긋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공적으로 '시작'했다고 위에서 언급했다. 보통의 범인(凡人)들을 등장시켜 작가가 전달하기로 목표 삼은 어떠한 주장과 매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말한 문학의 '간접성'을 적절하게 실천한 것이니까. 다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이유는 결국 책을 읽은 내가 그 끝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책이 잘못 쓰였기 때문이라기보다 독자로서의 내가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겠다. 그건 나의 읽기의 능력치가 성숙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90년대와 나의 절대적인 시간적 거리가 꽤나 멀어서이기도 하겠다.
나의 읽기의 한계에 대해서 더 이상 써봤자 그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셈이 된다. 그것만 쓸 것이었다면 애초에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소설집 전체의 감상을 적어 내려가기로 한 만큼, 단편들을 관통하는 주제를 말함으로써 이 글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한기, 그러니까 외로움이 서려있다는 감상은 모든 작품들을 지배하는 정서인 고통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소설집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소설 내에서 명시되든 아니든 모두 고통을 안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쪽이 맞겠다.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90년대, 책 전체적으로 사회로부터 도태된 인물들의 나열은, 단순히 개개인들의 사정이라고 생각되기보단 극복하기 불가능한 거시적으로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 분위기에 힘을 더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가까운 인물들의 죽음, 배신, 부재, 혹은 존재이다.
각각의 단편들의 세부적인 설정은 모두 다르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 긴장감은 갈등을 만들어내는 인물이 사라지더라도, 혹은 그들에게 가까스로 공감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건,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대립된 상대에게 가지는 적대심에서 그 긴장감이 만들어졌고, 작품 안에서 완전히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선과 자흔, 영진과 명환, 영현과 동걸, 인규와 어머니, 정환과 황 씨, 동식과 동영
'적대심'이라는 단어로 그들의 모든 심리적 갈등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를 쓴 것은 단순히 타인에게 갖는 해당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대심은 이 마음을 갖는 대상에게 갖는 두려움에 후행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든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말은 상대가 극복하기 어려운 좌절을 선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적대심으로 저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 적대심의 뿌리는 저들 사이에 존재하는 표면적인 갈등에 위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위에서 말했듯 모두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가족으로부터 파생된다.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 여수를 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어릴 때 아버지의 동반 자살 시도, 그것으로 인해 가족들을 잃은 공간적 배경이 여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의 붕괴 혹은 그와 준하는 상황은 등장인물의 근본적인 심리적 위태로움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주인공은 그 위태로움을 가진 것이 본인이든, 아님 그것을 가진 대상을 바라보든 적대심의 객체와 그 혼란을 공유한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이 바라보는 것은 바로 앞에 놓인 타인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놓여있는 거울이다. 그들은 상대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타인과의 갈등 해결은 결코 적대심의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적대심이 해소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와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강자가 될 수 없으니까. 상처에 손을 대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고통은 두려움을 수반하고, 두려움은 적대심에 선행한다. 상처 많은 우리의 내면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
각 소설들의 마무리는 모두 열린 결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해피엔딩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애초에 소설 전체에서 부정적인 분위기는 바뀌질 않으니까. 그렇다면 배드엔딩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린 결말이니까 그런 게 어디 있겠냐마는 책을 읽은 독자로서 짐작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외로움이 서려있는 작품이라면서 왜 배드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하냐면, 결말 모두에서 희망 아닌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 내에서 자잘하게 혹은 대단하게 그들에게 다가오는 갈등을 해결이나 회피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적극적인 극복의 노력이 책 속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겁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을 아주 절망적인, 불가항력적인 좌절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들은 결국 가장 절대적인 갈등에 마주 섰고 그 이후의 일은 모르는 것이다. 혹여나 그들이 필연적인 결말을 마주했다 하더라도 그건 배드엔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에는 희망 아닌 희망이 남는다. 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가능성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상처에 손을 내밀어 만졌거나, 혹은 시도하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 주어진 세상의 무작위성에 절망의 관성을 애써 무시하며 희망의 가능성을 한 스푼 더한다. 극복하려는 노력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다시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 듯 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서 갚기 힘든 빚이 있다.
작가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