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죄의식 그 사이에서
'나'는 한때 예술영화를 찍는 영화감독 '김곤'에 미쳐있던 때가 있었다. 특히 '김곤'이 영화를 찍는 도중에 어린 배우에게 가혹하게 했다는 구설수에 올랐을 때는 더더욱. 그 사건으로 떨어져 나간 가짜 팬들 사이에서 자신을 진짜 팬으로서 입장을 견고히 하고,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는 말로 '김곤'에게 보내는 사랑에 대해 묘한 짜릿함을 느끼면서.
'김곤'의 새로운 신작 GV에 '나'는 가게 된다. 그 사건 이후 처음 팬들을 만나는 자리이지만 다른 언급 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며 GV는 순조롭게 끝난다. 하지만 마지막 인사 직전, '김곤'은 고개를 숙이며 그 사건에 대한 사과를 건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면의 변화를 느낀다.
작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는 어떤 작품을 블로그에 옮겼나 찾아봤는데,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였다. 딱히 강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이번 해에도 성해나 작가의 작품을 고른 것은 내가 나의 감상을 가장 명확히 남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건 사고가 많은 시기에 잘 맞는 것 같기도 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래로, 흔히들 말하는 "상업"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와 같은 작가주의 영화를 더 비중 있게 봐오면서부터는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을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내가 보는 영화는 더 수준이 높은 무엇이어서, 지루하면 지루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런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은 소위 "영알못"으로 깎아내리고 나 자신을 "시네필"과 비슷한 수준으로 치켜세우며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최근에 알았음에도 그랬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그런 작품들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정말 더 수준이 높은 것 같아서, 나도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지루한 영화를 굳이 굳이 찾아서 보다 보니 취향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준이 높고 낮은 작품은 구분이 된다고, 그리고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는 말해야겠다. 모든 영화가 하나의 수준으로 평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동시에 이 말도 해야 한다. 영화의 수준이 더 좋고 더 나쁜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좋고 나쁨의 잣대를 쥐고 있는 것은 감독이 아니라 반드시 관객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영화의 가치 평가는 네이버 평점도 아니고, "썩은 토마토"도 아니고, 평론가들의 비평도 아니고, 오로지 개인의 눈으로 행해져야 한다. 즉, 순수한 나의 감상이 영화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기준이 될 때, 그 가치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것은 요즘 부정적으로 쓰이는 '시네필'적인 사고(思考)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봤을 때 그 대답을 듣고 비웃는 태도. 그거.
'김곤'의 스캔들로 인해 "빠에서 까"가 되는 상황이 심해질 때에도 지속적으로 팬 활동한 '나'에게 우연히 소위 찐팬들만 가려서 받는다는 '길티 클럽'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다. 그곳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벗어나 속칭 "우리"들끼리의 "든든한 바운더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던 도중 '김곤'의 신작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며 그 시상식을 보기 위해 오프라인 모임을 한다는 말에, '나'는 회사를 쉬고 애인에게도 거짓말하며 참석하게 된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흔히 분위기를 주도하는 실세는 영화과 재학생들이었고, 그들은 새로운 신작을 미리 보고 와서 영화에 대해 어려운 토론을 한다. 그 대화에 끼지 못해 소외감을 느낀 '나'는 어쩐지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옆에 앉은 '미지'에게 말을 건다. '나'가 좋아하는 '김곤'의 작품은 대표작인 '인간 불신'인데, 그것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동의해주는 '미지'의 앞에서 '나'는 신나서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던 도중 영화과 재학생들이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보며 웃는다. 귀엽다며, 소녀같다며. 그 말에 '나'의 얼굴을 굳어간다.
영화 산업에 대해 말이 많은 요즘 무엇을 느끼냐면, 영화에서조차 양극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관을 가는 경험의 횟수가 줄어들면서 영화, 특히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라는 문화가 모두가 즐기는 일반적인 취미가 아니라, 어떤─경제적인 수준으로 나눈 계층이 아닌─계층에게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현상의 기저에는 당연히 영화값 상승으로 인해 기회비용이 커진 탓에 실패하기 싫어 신중해진 사람들의 선택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앞서 말한 '시네필'적인 사고도 한몫하지 않나 싶다. 요즘 한국 영화에게는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그 영화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왈가왈부를 보면서 더 느꼈다. 어떤 영화는 보기만 해도 사람들에게서 바보 취급을 받는구나.
"시네필이세요?"라는 질문을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사태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다. 물론 그건 자칭 시네필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어디 가서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다 보면 이게 다 뭔가 싶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실 이 단편에서 주된 이야기는 이게 아니긴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어서 길어졌다. 그럼 이어서,
최근 들어 연예인들의 스캔들에 대해 많이 언급되고 있다. 꾸준히 그래왔지만 친근한 이미지의 그들이 한꺼번에 이슈에 휘말리면서 이래저래 말이 많다. 그들 중에는 책에서 문제화하고 있는 "창작자와 작품은 독립적인 존재냐"라는 논점에서 조금은 빗겨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개그나 유튜브 콘텐츠를 창작하기에 이런 논란에서 아주 제외될 순 없다.
창작자라는 인간과, 그 인간으로부터 나온 작품 사이의 관계. 항상 말이 많은 주제이지만,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대답에 항상 더 힘이 실리곤 한다. 가수나 감독, 혹은 배우들에 대해 이런 문제가 많이, 그리고 자주 발생하곤 한다. 누가 약을 했다더라, 학폭을 했다더라, 범죄를 저질렀다더라,라며 한 번 입방아에 오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큰 피해가 발생한다. 그건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이기도 하며, 혹은 반대로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때쯤 다시 미디어에 등장하곤 한다.
나의 입장을 이야기해보자면, 당연히 창작자와 작품은 분리해 설명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 창작자의 창작물을 소비하지 않는 행위는 존중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럼에도 소비하는 사람들도 존중할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던 정답이 없는 문제에 내려진 대답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더더욱 어떤 선택을 했다고 욕하는 건 존중될 수 없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겉돌던 '나'는 '김곤'의 미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실세들에게 적절히 호응하며 분위기에 녹아든다. '김곤'의 촬영장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던 도중 의도치 않게 스캔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모두 옹호하는 분위기로 마무리되어가나 싶었는데, 조용히 있던 '미지'가 목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건 실수가 아니잖아요."
언쟁이 오가던 도중 영화과 재학생들도 '그 여자'─이 부분에서 '미지'가 아닌 '그 여자'로 바뀌어 서술된다─에게 속 시원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가진 '나'가 맞서 대응한다. 입증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냐고. 그 말에 '그 여자'가 대답하려 할 때 시상식을 방영하는 스크린에 '김곤'이 등장한다. 모두의 관심은 그곳으로 향했고 언쟁은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나'에게는 "내 사랑을 제대로 입증했"다는 결론을 남긴 채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봤던 때에, 한 배우가 스캔들에 올라 자살까지 하게 되었던 적이 있다. 내가 좋게 보았던 드라마에도 주연으로 등장한 배우라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사실을 더 충격적으로 만든 것은 자살한 시점은 의혹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았던 때라는 점, 그리고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리가 되어 증거가 없다는 사실만 남기고 사건이 끝이 난 것이다.
그 배우가 정말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그건 그가 죽은 시점에서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되어버렸다. 단순히 의혹에 올랐다는 것으로, 출처를 모르는 혹은 검증되지 않은 증거로 순식간에 마녀사냥을 한 기자들과 거기에 호응한 네티즌들의 잔혹한 합작품으로 마무리된 사건을, 비슷한 내용인 <괴물>과 겹쳐보면서 깊은 착잡함을 느꼈다.
입증된 것이 없는 사실에, 혹은 입증이 되었더라도 어떤 사람에게 심각한 악플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오히려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 배신감을 느낄 순 있다. 그것에 악플 쓰는 거? 그게 그 사람들에게 응당 내려져야 할 법 이외의 처벌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요즘 그런 댓글 창을 보고 있으면 무서움을 넘어서 기괴함까지 느끼게 된다. 이 많은 욕들 중에 악플을 써도 될 만큼의 사랑을 보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저 이 기회에 마음껏 욕할 대상을 찾은 건 아닐까─'될 만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님을 밝힌다.
소설의 저 순간에서는 '김곤'의 의혹에 대한 입장 발표가 없었기에 '미지'의 태도는 방금 설명했다시피 경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의 반박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단편 전체에서 풍기고 있는 의미심장한 긴장감과, '미지'가 그 어린 배우의 어머니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정보에서 우리는 자신 있게 태도를 정할 수 없다.
물론,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라거나, 사람에게 심한 악플을 달아서는 안 됩니다! 와 같은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작가가 말하고자 함과 완벽히 들어맞진 않는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챕터와 이어진다.
길티 플레저란 죄의식을 느끼지만 했을 때 하면 즐거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글에서 나타나는 길티 플레저는 무엇일까.
'나'는 따지자면 '김곤'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오히려 균형 잡힌 팬이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순 있어도 '나'의 내면은 일부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친구들이 기막혀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 아이한테 같은 일이 일어나도 그 인간 감쌀 거니?
그 질문 앞에 서면 말문이 막혔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의심도 들었다. 나는 김곤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웠다. 만일 그 사건이 사실이더라도 쪽잠 자며 촬영하다보면 누구든 예민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실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근데 그래도 되는 건가. 실수라 해도 일곱 살 난 아이에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친구들 말처럼 만약 그게 내 아이의 일이었대도 나는 김곤의 영화를 몇 번씩 관람하고 굿즈를 소비할 수 있었을까.
보다시피 '나'는 그 논란이 되는 문제에 분명 의심을 가질 수 있고, 가지는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결국 옹호하는 입장으로 결정되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균형적인 사고를 위해 얼마나 열려 있는지다. 물론 '김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감독을 향한 합리적인 비판도 "아직 입증되지 않은 거니까"와 같은 태도로 무시한 걸 보면, 콘텐츠 소비자의 입장을 말하기에 '나'는 그리 좋은 본보기는 아니다. '나'가 '김곤'에 대한 비판을 반박할 때 쓰는 문장들은 맞는 말이긴 해도.
인격자라도 된 듯 돌을 던지는 사람들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르겠지. 오늘만큼은 '길티' 없이 '플레저'만 향유할 수 있을 테지.
'나'가 오프라인 모임을 가서 '미지'에게 말을 걸며 했던 생각이다. 언급된 것처럼 구설수에 오른 '김곤'을 소비하는 행위는 길티 플레저이다. 사람들에게 들키면 질타를 받겠지만, 그 행위가 나에게 행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확실한 것.
길티 없이 플레저만 있을 줄 알았던 오프라인 모임에서 '미지'가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완전히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모임은 없어지게 된다. 그 상황에서 '나'는 흔히 쓰이는 말인 중립 기어를 표방한 말로 '김곤'을 옹호해 침입자로 취급되는 '미지'를 무찔러 '길티 클럽'의 영웅이 된다. 모임 이후 '김곤'의 신작 GV에 가게 된 '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김곤'을 만난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난 이 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참담한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김곤이 말을 이었다.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다는 것 잘 압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작업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제 작품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께 죄송합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영현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려 합니다.
김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거듭 말하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수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펑.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그동안 '나'를 이끌었던 힘은 다름이 아니라 사실이 아니겠지,라는 일말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김곤'을 계속 소비했던 것이다. 나의 사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영웅처럼 등장할 나의 '김곤'을 상상하며.
단편의 처음과 끝에서는 각각 '김곤'이 그리고 '나'가 치앙마이의 타이거 킹덤에서 발톱과 송곳니를 제거한 뒤 약에 취한 호랑이의 등을 만진다.
망설이다 반석 위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호랑이의 등에 손도 얹어보았다. 상황에 익숙해지자 골을 뒤흔들던 악취도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자신이 쳇 베이커와 우디 앨런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모두 스캔들이 있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들의 작품이지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고 합리화하기도,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지만 피해자의 항변과 명징한 사실로부터 나는 늘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더 복잡해진다.
이 소설은 그러한 상충에서 기인했다. 죄의식과 사랑(혹은 기호)이라는 얇은 막 하나를 오가며 번민하는 나 또는 우리의 내면을 마주보고 싶어서.
창작자와 작품을 구분할 수 있나,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끝끝내 지어지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모순적이고 입체적이며 복잡한 존재여서,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결코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때가 많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합리화라는 건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효과 좋은 핑계거리라서, 위 질문처럼 첨예하게 갈리는 난제가 사실은 합리화가 만들어낸 괴물이고, 도의적인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대답이 도출되는 그런 시시한 질문이었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필히 합리화하는 존재이기에 결국 풀 수 없는 질문이라고.
그래서 그녀가 이 단편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입체적으로 모순적인 존재의 모순적이며 입체적인 질문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과정을 보고, 자신에게 반영하며 더욱 복잡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당신에게도 길티 플레저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