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무엇인가요?
2025년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영화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여행과 나날>을 선택했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딱 알맞은 영화였다.
일본에서 각본가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이'는 최근 자신이 쓴 각본이 의도대로 연출되지 않은 결과물을 보며 좌절감을 느끼고 각본 집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슬럼프라고 생각한 '이'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눈이 많이 오는 시골 마을에서 '이'는 숙소를 찾지 못해 허름한 여관까지 찾아간다. 거기서 여관 주인 '벤조'를 만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겨울을 여름보다 더 좋아한다. 군대를 다녀오면 겨울이 싫어질 거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쏟아지는 눈도, 살갗을 아리는 차가운 바람도, 훌쩍이는 코도 여전히 애정한다. 그건 겨울에 느낄 수 있는 온도차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차가움이 따뜻함으로 바뀔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온도적인 따뜻함만 있지 않다. 따뜻한 집, 따뜻한 목도리, 따뜻한 차. 이것들은 본래의 존재 목적인 몸보다 마음을 더 따스하게 만들어 준다. 그건, 온도가 변화한다는 사실만은 같은 여름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양상을 보인다. 뜨거움에서 시원함, 차가움에서 따뜻함. 이 둘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르다. 그 지점에서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고, 또 같은 이유에서 겨울에 겨울을 배경으로 만든 따뜻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며, 그래서 <윤희에게>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에 본 <여행과 나날>도 같은 종류의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참 잔잔한 영화구나 싶었다. 늘 일본 영화를 보고 오면 말하는 게 있는데, 확실히 특유의 정적이 있다. 물론 내가 그런 영화들만 찾아서 보는 것이겠지만. 이런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분명히 중간에 졸거나 아니면 아주 개운하게 엔딩 크레딧에서 눈을 뜨겠구나 생각했다. 애초에 영화가 큰 에피소드가 없고, 거의 영화의 대부분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어서 더 다이나믹이 없을뿐더러, 영화의 화면비가 요즘의 것들과는 달리 정사각형에 더 가까운 비율을 쓰고 있기에 풍겨지는 옛날 영화의 향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상당한 매력의 영화였다. 특히 앞서 말한 고정된 카메라가 주는 느낌에 놀랐다. 고정된 화면이라는 것은 그 해당 컷의 세상을 철저히 제한한다는 것인데, 동시에 관객의 상상력에 모두 맡긴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답답함과 같은 순간에 느껴지는 해방감이, 뭐랄까 꽤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카메라와 해당 신(scene)의 주된 피사체의 거리가 어떨 때는 가깝고 어떨 때는 아주 멀어서 더욱 상상력이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밖의 세상이 분명히 존재하는 거니까. 별개로 화면의 색감과 배경의 배치가 너무 예뻐서 그저 좋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형식적인 미에 대한 것이었고, 이제 내용을 보자면. 정말 간단히는 슬럼프를 가지고 있는 각본가가 여행을 통해서 다시금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를 떠나기 전에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말에 갇혔다고. 일본에 처음 왔을 때에는 모든 것이 생경하여 영감을 받을 만한 새로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과 곳에 익숙한 말들 뿐이라 거기에 갇힌 것이라고. 그렇게 떠나게 된 여행은, 실은 본인이 정말 쓰고 싶었던 소소하지만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여행'에 관한 시나리오의 현실판이었고, 그것은 영화 초반부의 주인공의 시나리오로 연출된 영화가 가졌던 분위기의 정반대의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로 인해 생겼던 좌절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그런 속삭이듯 희망찬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인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번아웃, 혹은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 이유는, 쳇바퀴 구르듯 지루하게 바쁜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함을 여행에서 오는 어색함을 통해 중화시켜보기 위해서이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결국 여행이라 함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의 본질을 '벗어남'으로 정의해 보겠다.
자아의 마비라는 말을 탈합치라는 철학 용어를 설명하며 언급했던 적이 있다. 계속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거기에 갇히게 되는데, 기존 상태의 끝없는 지속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인 균열을 일상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법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이 반복될 만한 하루를 만든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여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균열의 수단이 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앞두고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한다. 저 말이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 공간적인 특성이 들어가게 되는 순간 자유를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어디까지는 나가야 여행이지,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어떤 특성을 설정하면 안 된다. 왜냐면 그래야 우리가 여행을 가면서 느끼는 이상한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과 여행지 마을의 경찰관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찰관은 주인공에게 어디는 가봤냐, 여기는, 저기는 하며 질문하지만 주인공은 모두 가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이어지는 경찰의 말이, 그럼 어디를 갔냐는 말이었다. 그 말이 웃기기도 하면서 불편했다.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서 느끼는 이상한 압박감이라는 것이. 어디를 갔으면 여기는 꼭 가봐야지, 이거는 꼭 먹어봐야지,라는 말들은 당연히 추천의 한 종류이겠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나의 여행'이라는 것이 변색되는 느낌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짠 여행 코스는 물론 나의 여행이긴 하겠지만, 정말 '나'의 여행인가?
최근에 많이 느끼고 있다. 원래는 항상 여행을 갈 때면 사소한 계획까지 하나하나 설정하던 편이었는데, 그런 여행에 싫증이 생겼다기보단 즉흥적인 여행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러면서 여행을 갈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통제되지 않는다. 일상은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의 통제력의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전혀 아니다. 아무리 규칙적이고 절제된 삶을 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인생은 우리에게 통제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일상이 그러한데 여행은 오죽할까. 가기로 생각했던 음식점이 하필 닫았다거나, 꼭 타야 되는 교통편을 놓쳤다거나, 날씨가 좋지 않아 하려고 했던 액티비티를 하지 못했다거나, 그런 것들. 앞으로는 아예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은 무작위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여행으로 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떠나기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온통 여행 속에 있다.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니까, 그것이야말로 바로 '벗어남'인 것이니까. 그게 좋든 나쁘든.
지난 2년. 민간인이었다가 군인으로, 군인이었다가 민간인으로 바뀐 시절 동안 떠났던 일본, 제주, 부산, 김해, 인천, 고성, 속초, 춘천, 수원, 양주. 모든 곳에서의 좋고 나쁨을 생각한다. 그곳에서 느꼈던 기분 나쁜 이상한 압박감과 언젠가 느꼈던 해방감들을. 올해의 끝자락에서 그 시절들을 반추하며 정리하고, 앞날을 생각한다. 앞으로의 반드시 예정되어 있지만 언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해방감으로 가득 채워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