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진한 어둠을 밝히는 위태로운 촛불
영화와 마찬가지로 책도 여러 번 감상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이더라도, 긴 세월이 지나지 않았다면 선뜻 다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딱 작년 이맘때 <자기 앞의 생>을 읽었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독서 모임에서의 활동이었고 그렇게 잊고 지냈었다. 그러다 최근에 이 책을 선물 받았다. 감동적이었다고, 인상 깊었다며 건네주는 책을 보며 이미 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받은 김에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지만, 혹시 다른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일 것 같아서.
'로자 아줌마'는 예전에 매춘부로 살아가다가 늙게 된 후 그 일을 하는 이들의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태어난 이후, 기억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모모'라 불리는 '모하메드'는 '로자 아줌마'의 손에서 컸다. 주변 다른 아이들은 입양을 가거나, 부모님이 데리러 왔지만 '모하메드'는 그러지 않았다. 책은 '모하메드'의 성장을 다룬다. 더 정확히는 뇌혈증에 걸려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를 돌보면서 성장한 '모하메드'를.
급격하게 망가져가는 '로자 아줌마'를 돌보며 어린 '모하메드'는 당황한다. 도움을 받다가 이제는 도움을 줘야 하는, 그러니까 갑작스레 반전된 입장 속에서 '모하메드'는 생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배운다.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보며 마음을 가득 채운 그 감정에, 자신 있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사랑해야 한다'며.
사회에서 외면당한, 불쌍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서로밖에 없는, 안타깝지만 그렇기에 부러운 사랑스러운 이야기.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꼭 해야 되는 걸까? 사는 게 각박해져 나 하나만 생각하기도 어려워진 이 세상에서, 더군다나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며 헐뜯기 바쁜 이 사회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샌님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실속 하나 없는 그 행위가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히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존재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면 빠르게 사라지는 지독하게 잔인한 이 세상의 흐름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거센 바람에 맞선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들을 보면, 퇴근길의 지하철역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같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며, "사랑합시다"라는 5글자를 스케치북에 크게 써서 소리치는 사람. 퇴근하기 바빠 환승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을 보며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의치 않고, 꿋꿋이 고개를 세우고, 손을 번쩍 들어 목소리를 내는 사람.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열심히인가요.
피곤에 찌든 수많은 사람들 중에 몇몇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금세 다시 고개를 돌려 갈 길을 갈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5글자가 희미하게 남는다. 그런 사람들은 희미한 말 때문에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처럼, 의미 없는 손짓처럼 보일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전달이 어쩌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사랑 없는 세상은 암울해 보이니까.
<자기 앞의 생>이 바로 그 열심히 소리치는 사람 같다. 늙고 병들어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로자 아줌마'와, 물건을 훔치거나 달리는 차 앞에 뛰어들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모하메드'의 사랑 이야기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로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가뜩이나 끌어내기 어려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는 셈 치고 이 책을 다 본다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하메드', 그리고 '로자 아줌마'를 살게 한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라는 걸.
처음에는 둘을 보며 의지할 사람이 서로뿐인 상황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했다. '로자 아줌마'가 아프기 시작하고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모하메드'는 동네를 돌아다닌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가 '모하메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즈음 '모하메드'는 부모가 없고, '로자 아줌마'도 아파 제정신이 아닌, 그러니까 솔직히 얘기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고, 결국 '로자 아줌마'에게 향한다. 그건 다른 목적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게 맞으니까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어떠한 조건도 없이, 오직 그 사람이어서 사랑했기 때문에.
병원을 무서워해 가기 싫어했던 '로자 아줌마'를 '모하메드'는 지하실로 옮기고, 죽고 나서 까지도 그 곁을 지킨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나면 향수를 뿌려주고, 푸르게 변해가는 '로자 아줌마'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면서. 그때 '모하메드'는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썼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힘은 더 발휘된다. 누구라도 감히 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사랑에서 나온다. 끔찍하다고 생각이 될 만한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 나는 일말의 부러움을 느꼈다. 서로만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에서, 책의 마지막에서는 둘의 관계가 부럽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모하메드'가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서술자로서, 책의 문체는 솔직하며 동시에 비유적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창의력에서 나온 이야기는, 책을 읽는 독자도 어린 나이로 만들어버리는 효과가 있다. 나이를 먹으며,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하는 '모하메드'의 모습이 문체에 묻어 나오는데, 그러면 괜히 내가 대견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그렇게 어린 눈으로 전달된 사랑의 이야기는, 어떨 때면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책의 마지막 챕터는 <자기 앞의 생>에 대해 최은영 작가가 쓴 글이다. 작가는 이렇게 썼다.
『자기 앞의 생』은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고, 상처받을까 봐, 나의 것을 잃어버리고 손해 볼까 봐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에 문을 두드린다. 너의 안에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삶은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가난하고 공허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조차도 사랑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의심할 때가 있다. 나 자신도 건사하기 힘들 때, 사랑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런 생각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본다. 내가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만든 자기 방어 때문에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힘을 누르고 또 누른 것이지 않을까.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사랑을 받고 못 받고의 여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받을지, 그런 걸 생각하지 말고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사랑하라는 말. 최은영 작가의 말대로 그런 삶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해야 한다는 건,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쓰인 가장 밝은 이야기를 읽었다.
생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를 파괴하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태어나게 한 생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