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나히

우연성에 숨어 회피한 책임은 누구의 것?

by 재승

요즘 들어 영화가 많이들 나오고 있고, 더군다나 볼만한 것들이어서 좋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 중 하나를 봤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 영화. 보러 갈 때부터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해서 그렇게 극찬들일까, 하고.


수감자들을 고문했던 정부 고문관이 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문당한 이들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고문은 수감자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새겼다. 그들이 기억하는 건 단 하나, 정부 고문관은 의족을 끼고 있으며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


어느 날 '바히드'는 차가 고장 났다며 도움을 요청한 하는 가족을 마주한다. 그러다 익숙한, 그리고 섬뜩한 소리를 듣는다. 도움을 요청한 남자, 그러니까 한 가족의 가장이 만드는 발을 끌며 삐걱거리는 소리. 충동적으로 그 남자를 납치한다. 그리고 생매장을 하려다 자신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남자의 말에 멈칫한다. 다시 그를 차에 태우고 이번엔 같이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딜레마에 놓인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불안함, 고문관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향한 분노,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도리. 그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심해진다.


영화의 원제는 다음과 같다.

It Was Just an Accident

(Un Simple Accident)


Accident와 Incident. 생긴 것도 비슷한 두 단어는 '사건'이라는 같은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두 단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뉘앙스에 있다. Accident는 우연함이 지배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것들. 그래서 '사고'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영화의 제목, <그저 사고였을 뿐>를 읽을 때 우리는 쉽게 그 '우연함'이 개입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보면 그 우연성에 기대어 하는 변명처럼도 들린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하기.


영화의 오프님은, 어두운 밤에 한 가족이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때 차가 무언가를 친다. 내려서 확인하는 남자. 그건 개였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차에 탄다. 아빠가 개를 죽였다는 딸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며. 하지만 딸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무란다. 개를 죽인 건 아빠지 신이 아니라고. 뜬금없이 보이는 이 영화의 오프닝 속 대사들은 끝나고 난 뒤에 다시 곱씹게 된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 크게 없다. 고문으로 인해 외적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상황. 하지만 그가 정말 고문관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폭력적인 방법을 통한 복수는 같은 굴레를 낳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 고문의 피해자들끼리는 그 '인간됨'을 두고 고민한다. 누군가는 저런 놈한테 그런 걸 신경 쓰냐며 본인이 다 알아서 하고 책임질 테니까 허락만 해달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결국 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며 갈등한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서슴없이 나쁜 짓을 하지만, 그걸 당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아량을 베풀려는 상황. 착하다는 건 뭘까. 수감자들이 착하다는 것으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인간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를 보며 생각해 봐야 할 것을 두 개 생각했는데, 이 지점이 그중 첫 번째이다.


─ 양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앞에 놓인 선택지들 중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는 강제력이 우리에게 작용된다는 말과 같다. 살아가는 존재로서 최우선의 목표─현대사회에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생존을 위한 선택을 할 때에도 그 강제력은 제외될 수 없다. 자 여기서, 양심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생존 가능성이 다르고 후자가 그 가능성에서 더 높은 비율을 가져간다면 우리에게 양심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인간에게 있는 고귀한 '양심'이라는 것의 권위에 대해 도전해 보려 하는 것이다.


영화 속 수감자들은 결국 그 남자가 정보 고문관이 맞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서 그 무엇도 빼앗아가지 않는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다는 말로, 혹은 "같은 복수의 굴레를 만들고 싶지 않"다 따위의 고결한 말들을 곱씹으며 그들은 '양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남은 상처, 그리고 용서까지도 모두 당한 피해자들의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힘든 결과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양심을 가지지 않으면 괜히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피해를 받지 않아도 되며, 시원한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빌어먹을 양심은 도대체 왜 우리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 글은 김상덕. (2024). 양심이란 무엇인가 ― 양심에 관한 신학과 신경과학의 대화. 신학사상, 206, 193-223. 을 읽고 썼음을 밝힌다.


위 논문에서는 "인간 정신(마음)이 도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기"위해 신경과학철학자인 패트리샤 처칠랜드와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논의를 설명한다. 간단하게 결론만 이야기해 보자면,


처칠랜드는 "인간의 도덕적 직관으로서 양심이 인간에게 내재한 고유한 본성이라기보다 애착의 관계와 사회적 유대감을 증진하는 과정에서 학습되고 진화해 온 결과"라고 생각하며 "이 과정에서 양심은 인간 생존의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라며 설명한다. 그러니까, 처칠랜드가 중요하게 여기는 '애착'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집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요소이며, 양심적인 행동은 그 애착을 향상시키기에 우리가 양심적이게끔 학습했다는 것이다.


다마오지에게 양심이란 "생존과 관련된 기질에 의해 내려진, 이익과 손해의 명령을 넘어서는 능력"이고, "진실을 찾게 만드는 것으로서 부조화를 비판적으로 탐색해 내고, 사실에 대한 분석과 행동을 위해 기준과 이상을 구축하고 하는 욕구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가졌다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겪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형성된 "확장 의식의 결과"가 바로 양심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시간 동안 "어떤 삶의 방식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느끼고 배우며, 기억하고 상상해감으로써 양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둘의 의견에는, 양심을 가진 종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다른 생물체들보다 높은 지위를 설명하는 것에 차이점이 있지만, 양심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 가지게 된 본능이라는 점은 둘 다 동의한다. 즉, 양심적인 행동이 인간의 생존에 그렇지 못한 행동보다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당장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양심을 가진 인간이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 더 낮은 생존 가능성을 가진다'는 위에서의 나의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문장 자체는 맞는 말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양심을 인간의 본성과 같은 지위에 올려놓게 된 것은 길고도 긴 인간의 역사가 선택한 것이며, 그렇다면 결국 '양심'을 가진 인간은 장기적으로 더 높은 생존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양심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납득을 하게 된다. 물론, 착한 사람들이 피해를 더 감수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 책임의 대상


생각해 봐야 하는 것들 중 또 하나는 책임의 대상이다. 그러니까, 고문을 당한 수감자들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 과연 정부 고문관이 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고찰.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고문관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영화의 등장인물 중 '시바'의 추궁 끝에 결국 진실을 말하게 되고 사과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에서 남자는 자신의 그저 체제를 따랐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너희들과 다르지 않다고, 자신은 시킨 것을 했을 뿐이라며.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잘잘못을 질문해야 할 대상은 정말 누구일까.


영화에서는 고문관의 가족을 보여준다. 고문을 당했던 수감자들은, 납치한 고문관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다급한 딸의 전화를 듣고 가서 도와준다. 아들을 낳은 아내의 모습과, 자신의 아버지를 납치한 사람들인 줄도 모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여주는 장면은 참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문관은 그들에게 모두 몹쓸 짓을 했으며 그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족의 등장은 그것만으로 우리를 가로막는다. 그 남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 해맑은 미소를 가진 딸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한번 선택을 미룬다.


이 지점에서 오프닝에서 딸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선택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고문을 한 것은 당연히 고문관이 맞다. 그의 선택이 더 높은 사람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 행한 것은 고문관이 맞다는 것. 결코 그 남자는 자신의 죄를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한 선택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 남자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


진부하게도 당연히 아니다. 사실 고문관의 말도 맞다. 그는 시키는 일을 한 것이고, 그도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했어야 됐다는 것. 물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력해졌다. 수감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없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진짜 대상은 고문관보다 위, 보다 위, 보다 위일 수도 있다. 우리의 역사가, 그리고 다른 문학 작품들이 많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정작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들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라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나.




실제로 감옥살이를 한 감독이 같이 수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이 영화. 현재 이란의 상황과, 이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더더욱이 이 영화가 무겁게 느껴진다. 사회 고발적인 영화가 갖는 특유의 무거움이, 적절한 우스꽝스러움과 섞이며 오묘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이 굴레를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책임을 회피하는 문장을 고쳐주는 딸의 말을 보며, 나를 포함한 미래 세대가 가져가야 할 고민을 생각한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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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소년이 온다> 中


부서진 유리는 다시 붙여도 부서진 유리다. 그들에게 삐걱거림은 평생 두려움의 대상일 것이다. 그 소리가 유리를 부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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