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물살을 이기는 건
군대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책을 왕창 살 적에, 골라 담았던 책이었다. 들어봤던 것 같기도 했었고, 순위도 꽤 높았고, 무엇보다 재밌게 봤었던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가 속해있는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다른 작품이어서 더 믿을만했었다.
책은 진평에 사는 '도담'과 그곳으로 이사를 온 '해솔'의 이야기를 다룬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두 남녀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여러 다른 책들이 생각났었던 것 같다. 성장 소설이라는 점에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 왜인지 모르게 이야기 전개나 문체에서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과 김청귤 작가의 <재와 물거품>, 주인공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에서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
사실 사랑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클리셰적이라고 생각을 해서, 책은 잘 읽었는데 뭔가 드라마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는 거. 그래서 여러 다른 책들이 생각이 난 게 아닌가 싶다.
성장 소설이 주는 느낌은, 결말이 쉽게 예상이 되더라도 주는 뭉클함이 있다. 같이 성장을 해나간다는 느낌 덕분일까. 어떤 것들을 느꼈나.
'도담'과 '해솔'은 같은 사건으로 각각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잃었다. 그럼에도 두 명의 상황은 같지 않기에 받아들임이 달랐는데, 그중 '도담'의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모든 게 제자리에 있던 것 같은 삶에 갑자기 너무 큰 상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도담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담'이 아버지를 잃고, '해솔'과 헤어짐도 예견된 상태에서의 서술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 그 누가 겪어도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다 겹쳐져 주변의 시선까지 달라지니 '도담'은 스스로를 불행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린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의 시선을 보며 '도담'이 떠올린 생각.
어른들이 쟤는 액운이 꼈으니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까. 나는 저들에게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적어도 내게는 저렇게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행복한 거야,라고 위안 삼을 만한 불행의 표본이 되었겠지.
항상 비교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엿본다. 그러지 않고 싶지만 나조차도 그러고 있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자라서 대학생이 된 '도담'. '도담'은 계속해서 자극을 찾는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집단들.
새로운 그룹에 속할 때마다 진평에서의 일이 없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 정말 없던 일이 되는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들의 눈으로 자신을 볼 때에만 자신이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와 가진 술자리.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학 친구를 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도담은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이후 성인이 되어 데이트 상대인 '승주'와 대화하다가 무례한 말을 내뱉고 스스로 후회하는 '도담'.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상처의 가치 판단에 대해서 생각한다. 같은 불행을 겪더라도 사람마다 그걸 마주하는 법이 다르다. 누구는 개의치 않게 여기고자 할 수 있고, 누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사건에 대해서 제3자가 당사자의 힘듦의 정도를 정하는 것은 심한 월권이라고 생각한다. 즉, 힘듦의 정도를 측정하는 건 오직 당사자여야 한다. 그 말은 다른 결론으로도 이어진다. 상처는 결국 비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결론. 위 인용의 마지막 문장.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확실히 관통하는 말인 듯싶다. '너네는 이런 고통 안 겪어 봤잖아' 같은 말은 본인이 얼마나 가난한지 자랑하는 것과 같다는 말.
'승주'에게 사과를 하고 진솔한 대화를 하며 '도담'은 깨닫는다.
승주도 떠올리기 싫은 실망스러운 기억을 가졌구나.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우물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깊은 우물. 남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아는 순간 본인의 사연을 다시금 바라보게 된다. 작아지거나 하찮아지는 게 아니다.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어쩌면 안도감으로.
책의 초반, 계곡에 놀러 간 '도담'과 '해솔'. 깊은 계곡을 보며 '도담'이 이야기한다.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해.
둘은 그 사건으로 인생의 소용돌이에 빠졌었다.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수면으로 나오려 발버둥 칠 뿐이었다. 누구는 치명적인 자극으로, 누구는 의도적인 외면으로, 계속해서 회피하며 살아왔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다시 재회하게 된 '도담'과 '해솔'. 조금은 약해진 적대감으로 상처를 다시 바라본다. 진평에서의 친구와 다시 그날의 이야기를 했던 '도담'은 이렇게 말한다.
다 털어놓고 나니까 뭔가 응어리가 조금 풀린 것 같아. 여태 진평을 떠올리는 건 뭐든지 덮어두고 피하기만 했는데 이제야 직면한 기분이랄까. 생각만큼 아프지 않더라고.
그 말은 들은 '해솔'은 진평으로 가자고 한다. 다시 그곳을 마주하러.
상처를 직면하여 그 응어리를 대부분 지웠지만, 그것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도담은 그날 이후 자기감정을 의심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면 강하게 의심했고
행복을 느끼면 자신이 겪게 될 낙차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해하지 못했다.
자랄수록 무지(無知)가 주는 용기를 부러워할 때가 꽤나 있다. 차라리 이별이, 실패가 이렇게 아픈 줄 몰랐으면 하는 마음들. 그게 쌓이다 보면 '도담'처럼 되는 것 같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해하지 못하는 거. 그런 '도담'을 보며 '해솔'은 이야기한다.
지금 너는 행복이 두려운 거야.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얼마나 좋은 말인가. 정말 좋은 말이어서 교과서처럼 느껴진다. 모르진 않는데, 어려우니까.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고 한 이유는, '도담'과 '해솔'이 일상이 바쁠 때나, 아니면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고 있어도 서로를 계속 생각했다는 점이다. 물론 전 애인이 떠오를 순 있겠지, 다만 평범하게 과거 회상을 하는 것과는 달랐다. 서로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구의 증명>을 읽으 생각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상대방의 존재가 '응당 그래야 함'으로 작용하는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된 시련들을 읽다 보면, 구와 담에게는 서로의 존재가 행운인지 불행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구의 증명>을 읽고 글을 쓸 때 적은 문장이었다. 물론 '구'와 '담'의 관계를 '도담'과 '해솔'에게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집착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돌아와서, 그래서 둘의 존재는 행운인가 불행인가.
<급류>에서 '도담'과 '해솔'은 마지막에 재회하기 전 각각 '승주'와 '선화'라는 이성을 만나 교제한다. 그 둘의 존재로 '도담'과 '해솔'은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도담'과 '승주'.
저는 이별에 영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도담 씨는 이별 잘해요?
글쎄요. 이별을 잘하고 못 하는 게 있나?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이별을 받아들이면서 사는지 모르겠어요.
(...)
세상에서 자신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을 잃는 거잖아요. 그게 누적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서 잊고 치유되는 것도 있긴 하겠지만 대체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요.
사람들은 모두 다르기에 대체되지 않는 부분은 반드시 있다. 그 부분이 크고 작은지에 따라서 지독한 사랑이 되냐 아니냐를 가르게 되는 것 같다. '구'와 '담'도 서로만 이해하는 아픔이 있는 것처럼, '도담'과 '해솔'은 같은 사건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잃었다. 이 지점이다. 서로가 서로의 얼마나 큰 아픔을 차지하는가.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인 상황. 어릴 때 만나 교제를 하게 된 것도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걸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밖에 없다. <구의 증명>과 <급류> 모두 주인공들이 어릴 적에 만나 교제를 했던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것도 대체 불가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결말이 해피 엔딩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긴 한데, 단순히 그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어려운 필연적인 시련들이 있다.
'해솔'을 만나기 위해 '승주'에게 이별을 고하는 '도담'. 본인을 속였다는 배신감을 느끼며 처절하게 붙잡는 '승주'에게 이야기한다.
미안해. 변명하지 않을게
사랑에 빠진 거야?
도담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해솔에 대한 도담의 마음은 연애 감정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할머니의 사랑과 비슷할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랑처럼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이건 한때 끓고 식는 종류의 마음이 아니다. (...) 난 빠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
'빠진다'는 말을 '도담'은 좋아하지 않았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사랑에도 종류가 있을까. 사랑 애(愛)를 단어 끝에 붙여 만든 각종 단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종류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럼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똑같은 어떤 감정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 똑같은 어떤 감정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궁극적인 '사랑'이라는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해솔'이 그 사건을 생각하며 한창 힘들어할 때 '해솔'의 할머니가 했던 말씀이 있다.
시련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책의 마지막 문장.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변칙적인 파도에도 길을, 서로를 잃지 않고 수영하는 법은 결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너무 절망하지 말자,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