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 황슬기

모든 홍이에게, 모든 서희에게

by 재승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시작 전 광고 시간에 <홍이>의 예고편을 봤다. 꼭 보고 싶었다. 예고편이 그리 특별했던 게 아니었는데도.


요양원에 있던 엄마 '서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딸 '홍이'. 그렇게 둘의 동거가 시작된다.


대단한 울림이 있었냐, 하면 글쎄. 나도 모르게 극적인 화해와 해피엔딩을 꿈꾸었나. 사실 보는 내내 불편했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영화에서 비추어주는 '서희'와 '홍이'의 인생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그랬다. 사실적인 묘사에 더욱 힘을 얻는 것은 불행이다. 언제부터 현실적이다는 말에서 부정적인 쓴맛을 지울 수 없게 된 걸까. 영화관을 나오는 나의 입안은 비릿하고 텁텁했다.


돈 때문에 요양원에서 엄마를 데려온 딸. 그리고 그걸 알고 있는 엄마. 그들은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있지만 그건, 그저 사용 금지 구역에서 이미 심지에 불이 붙어버린 폭죽과 같다. 여기서 그거 하시면 안 돼요. 이미 붙였는데 이것만 할게요. 아니, 안돼요.


엄마 '서희'는 집을 원한다. 딸 '홍이'의 집은 집이 아니라고. '집'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서희'는 다시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난 이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나.


─ 늙는다는 것


우리는 늙는 것을 왜 두려워할까.


최근에 누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무한하게 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말을 나눴던 적이 있다. 무한하다면 쉬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삶의 목표라서, 그게 이유라고 대답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왜 그렇게까지 여러 가지를 했나 생각해 보면 저 이유 때문이었다. 바쁘다고 느끼면, 게으르지 않더라도 시간에 쫓겨 살아간다면 나 스스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한가하다고 생각할 만큼 쉴 때면 조바심을 느꼈다.


나는 존재가치가 없어진 사람이 되는 게 무섭다. 그리고 그 말은 나이 드는 게 두렵다는 말과 같다. 늙는다는 말이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이라는 건 슬프지만 결국 맞는 말이다. 가로를 시간으로, 세로를 능력으로 설정한 그래프를 생각해 보자. 사이에 몇 개의 변곡점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그래프의 양 끝은 음의 2차 방정식이 그러하듯 끝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게 인간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추한 늙음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늙게 만든다. 이전에는 가뿐하게 했던 것들이 버거워지고, 오래 걸리며, 종국에는 하지 못하게 되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들보다 강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는 그것이 나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연륜이라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단어가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우리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들어줄,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능력치를 한 손에 쥐고 그동안 내가 잘 쌓아왔기를 바라야 한다.


'서희'는 치매에 걸렸다. 이 사실을 영화는 대놓고 표현하진 않는다. 요양원에 있었던 것, 멀쩡해 보이지만 혼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치매를 표현하는 다른 몇 개의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다. 치매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영화에서 꽤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어쩌다 혼자 남게 된 '서희'가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한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난 뒤, 바닥에 뭔가가 떨어진다. 라면 분말스프와 건더기스프가. 그리고 그걸 쭈그려 앉아 바라본다.


살면서 셀 수 없을 만큼의 라면을 끓였을 텐데. 이젠 정말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을 뜻하는 장면인듯싶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그렇게 늙어버린 인물에게 느끼는 측은함, 그 인물이 느낄 당황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할머니도 엄마도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가장 아름답게 늙는 방법은 무엇일까.


─ 엄마라는 존재


가장 가까운 듯 멀고, 가장 편안한 듯 불편한 사람.


같이 보내는 시간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꼭 반비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쩔 때면, 아니 꽤나 자주 우리는 친구들보다 혹은 애인보다 엄마가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엄마여서 말하지 못하는, 안 하는 것들이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괜히 말했다가 걱정할 테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이런 말들로 엄마를 위하는 척한다, 내 마음 편하기 위한 말들이면서.


'서희'와 '홍이'의 이야기는 사실 나한테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는 나의 엄마와 그리고 외할머니의 관계로 보였다. 나는 딸도 아니고, 우리 엄마는 아직 '서희'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기에 당연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서희'와 '홍이'는 모두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꽤나 불친절해서 그들의 과거사를 알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니, '서희'가 내뱉는 모진 말들의 배경, 그리고 '홍이'가 '서희'에게 느끼는 원망의 출처는 제 3자인 관객 입장에서 당연하게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그걸 감독이 몰랐을 것 같진 않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겠지.


그렇게 서로 미워하면서도 '서희'와 '홍이'가 서로에게 갖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책임감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내가 좋아했던 게 아니야, 네가 좋아해서 했던 거지", "나 그거 안 좋아해, 엄마가 좋아했지."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사랑해로 들리는 말들이 있는데, 같은 종류의 것들이지 않나 싶다, 다만 위에 문장은 하면 할수록 점점 색이 바래가는 말들이지만.


아무리 못된 부모라 해도 자식들은 그들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인 이유로? 혹은 진화론적인 측면으로? '서희'를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홍이'는 떠나려는 '서희'의 손을 꽉 잡는다, 본인도 알 수 없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고는 돌아와서 '서희'가 발가락에 바른 매니큐어를 자신의 발가락에 똑같이 바른다. 이제는 없어진 존재가 만들고 간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것,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그 존재가 나에게 끼친 영향의 방향과는 상관이 없는 걸까. 막상 빌런이 없어지고 내심 새로운 빌런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영웅의 모순처럼.


모든 엄마는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떠올릴 때면 괜히 몰랐던 것처럼 꽤나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존재하기의 전 이야기는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기억이 없는 시점의 어린 나에게도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가 오직 딸이었을 때를 떠올리면 뭔가 하면 안 될 것을 하고 있는 것만 같고 조심스러워진다. 아마도 그건 엄마의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그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엄마라는 이름을 수단으로 이용해 그녀에게 맡긴 희생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 때문일지도. 그러니까, 엄마의 옛날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건 동시에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그녀의 어린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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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각각의 개인들에게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떠나서 볼만한 영화임은 분명하다, 특히 자식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딸들에게.


우리 엄마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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