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025

내 인생 가장 치열했던 한 달

by 김글인


이제야 비로소 한숨 돌리는 온전한 하루가 있었다. 내 삶이 송두리째 번쩍 들어 올려져 정반대 방향으로 뒤돌아 앉혀지는 과정이랄까. 2025년 8월은 아마도 세상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떠올릴, 가장 굵직한 시기 중 하나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브런치와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길 세 달여, 비로소 소회를 문장으로 만들어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날이 다시 찾아왔다. 그렇다. 글로 쏟아내는 것은 지나온 나를 온전히 보듬어 안는 과정이 될 것이다.


2024년 12월 남편의 폴란드 주재원 결정을 한 후로, 나의 일상은 8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가족의 삶을 폴란드 바르샤바로 옮겨가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집을 내놓아 세입자를 찾고, 살림살이를 정리하여 가져갈 것과 처분할 것들을 선별하고, 아이들의 새 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일과, 새로운 환경 변화에서 맞닥뜨릴 아이들과 남편의 정서를 가늠하는 그 모든 과정들... 나의 기질 상 타인을 걱정하는 것이 먼저이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은 뒤로 밀려나 있었다.


출국 이틀 전으로 계획한 비자 발급에 차질이 생길까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서류 준비로 발을 동동 구르던 것부터, 살던 집을 비워주고 일주일 간 지낼 단기임대 집으로 수화물 가방 20개를 옮긴 것, 제한된 무게를 넘지 않도록 꼼꼼히 다시 싼 수화물을 밴에 싣고 새벽부터 대구를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가던 과정은 마치 007 작전을 떠올리게 했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해서 임시 숙소로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중3이 된 큰 딸이 거뜬히 성인 한몫을 해냈던 것은 이번에 느낀 감격적인 감회 중 하나였다. 폴란드 입국 일주일 후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된 두 딸을 토닥이는 것과, 새벽부터 남편과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상, 몇 년 간 살게 될 우리 집을 결정하는 과정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은 먹거리에서부터 입는 것, 잠자리, 그야말로 인간의 기본 생활인 의식주를 걱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와 다른 날씨에 필요한 옷과 물품들, 현지의 먹거리들을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요리하는 것, 가족 구성원 각각의 치열한 하루를 누일 수 있는 잠자리를 갖추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다. 마트의 계산대에서, 집 계약서 작성에서, 심지어 화장실을 찾아갈 때도 헤매는 일상이 이어질 정도였으니, 한국에서의 45년 삶 동안 의식주를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고 느껴본 적 없이 살아왔다는 깨달음도 찾아왔다. 그만큼 발전된 한국 안에서 나는 안정된 유년기와 성인기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 우리 가족이 뚝 떨어진 듯한 상황에서는, 정말 생존의 문제로서 집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의 의복을 준비하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집에서만큼은 어루만져야겠다는 나의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폴란드 입국 후 한 달, 한국에 살고 있었더라면 몇 년에 한 번쯤 겪었을 만한 일들을 한 달 내에 압축해서 겪고 난 시점, 지난 한 달이 3~4개월처럼 길게 느껴진다. 어쩌면 정말, 시간이란 것은 일정하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몸뚱이가 겪어내고 기억하는 사건들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은 1초라는 단위 시간의 연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느껴진다. 인생을 영화 필름이 휙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어느 글에서처럼 내가 느낀 당황, 감격, 혹은 고군분투하거나 행복했던 그 모든 강렬한 감정의 장면들이 연속된 프레임으로 주루룩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매일이 똑같은 일상으로 반복되는 흐름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야말로 전혀 다른 속도다. 누군가의 하루가 2개의 장면이 지나가는 속도라면,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는 10개의 장면이 지나가는 것이다.




지난 한 달은 지난 내 생애 그 어떤 때보다도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정신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사건들과 사람들로 촘촘히 이어지는 하루하루는 숨 고를 틈 없이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 하루들이 모여 이룬 지난 한 달은 아주 긴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회가 느껴진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휙휙 지나가던 그 장면들 속에 내가 존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멀찍이 떨어져 나와 영화의 관객처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막막하고 막연했던 상황들, 불가능하다고 두려워했던 예측들이 예고편이었다면, 지난 한 달의 시간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지금은 상영 중인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각 장면들 속에서 몸으로 부딪혀 해결해 나가던 현장들은 사전 예측도, 지난 기억도 아닌, 즉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의 내가 움직이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순간마다 나는 열심히 생각하고 바쁘게 실행에 옮기는 살아있는 나 그 자체였다.


두려움의 본질은 실체 없는 막연함일 뿐이었다. 예상치 없이 막연하던 그날은 결국 내 앞으로 다가왔고, 나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나의 실제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나는 죽은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이므로 어떻게든 내 안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그 상황에 대처해야 했고, 그 모든 장면들은 그럭저럭 나의 행동으로 관통하며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낯선 땅에서의 첫날과 한 달이 지난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건과 대처 경험이 쌓여, 부쩍 성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나 자신이 한편으로 뿌듯했다. 이제 중년이라고 불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애 같다고 느껴왔던 나 자신이, 이제와 낯선 땅에서 뒤늦은 성장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 기회를,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낼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성장을 꾀하는 시기로 만들겠노라고 마음속으로 자꾸 되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요, 근로자로서 경제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의 평범한 주부다. 심지어, 온갖 간편한 서비스가 갖춰진, 배달음식과 새벽 배송과 같은 편리함이 일상화되어 있는 한국이 아니라, 진정한 주부 모드인 것이 사실이다. 누가 유럽을 그렇게 찬란하게 말했던가. 누가 주재원을 그렇게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가. 하루하루 겪는 굵직한 에피소드들은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들이기에, 선배 주재원 주부가 한 말처럼, '주재원 생활로 진짜 책 한 권 나온다'는 말을 나는 사실로 만들어보고자 한다. 나의 에피소드들을 바리바리 엮어 '책 한 권 나오는' 내 성장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첫 주재원 적응기, <바르샤바 다이어리>를 시작하는 것으로.



** 일상 속에서 틈틈이 써두었던 글들을 솎아내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