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용어 TMI - 이생망1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by 복희
그냥 이번 생은 망했어요. ㅎㅎ.

다섯 번째 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 인생의 리셋 버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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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재벌집 막내 아들(2002)』’, ‘『내 남편과 결혼해줘(2024)』’, ‘『선재 업고 튀어(2024)』’

이 드라마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요즘 학생들이 열광하는 이 드라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거나,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라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우선, 『재벌집 막내아들』은 죽임을 당한 재벌 비서가 과거로 회귀해 복수를 꾀하는 이야기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남편의 불륜에 배신당한 여자가 10년 전으로 회귀해 복수를 다짐하고, 『선재 업고 튀어』는 타임슬립한 여주인공이 10년 전 학생 시절로 돌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선재’를 죽음에서 구한다.


우리나라 작품은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던 『‘최애의 아이(2023)』라는 일본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팬이 아이돌의 아기로 환생해 자기 엄마(즉, 자신이 좋아한 아이돌)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복수극이다.


이런 황당무계하고 비현실적인 스토리의 콘텐츠들이 한국에 갑자기 늘어났다. 물론 이전에도 '『옥탑방 황태자(2012)』'이나 '『보보경심 려: 달의 연인(2016)』' 등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꾸준히 있었다.

예전의 타입슬립물은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인물이 현실에 등장하는 단순한 이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즘의 시간회귀물은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인물이 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런 콘텐츠가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 문화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낯설지 않은 플롯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런 플롯이 한국에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요즘 학생들이 잘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이생망’이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를 줄여 ‘이생망’이라고 한다. 이 단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는 이번 인생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는 자조적, 체념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생망’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온라인 커뮤니티(특히 오늘의 유머, 디시인사이드, 네이트판 등)에서 자연스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취업난, 학벌 문제, 주거난(집값 상승) 같은 요인으로 겪는 사회적 좌절과 맞물려 젊은 세대에서 큰 공감을 얻었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건 지금 근무하는 학교 바로 전 학교였다. 코로나 전이었으니, 2018, 9년쯤 됐을 것이다. 그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요즘 젊은 애들이 ‘이생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런 극단적인 단어를 진짜 학생들이 사용한다고?’,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 놀라웠다. 그래서 같은 학년을 가르치는 나보다 젊은 선생님께 이 단어를 아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생님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고 답하면서, 실제로 사용하는 학생들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나 역시도 그럴 것이라 공감했다. 방송에서 과장하는 거라며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런데 그 주에 국어 수행평가가 있었다. 수행평가를 마치고 시험지를 걷어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던 나에게 학생이 와서 말했다.


“쌤, 국어 수행 망했어요.

이번 생은 망했나 봐요. ㅎㅎ”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학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면서 이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망하긴 뭘 망해, 담에 잘하면 되지.”


내 핀잔 같은 격려에 학생은 “네~”하고 대답했다.

대답 후 멀어지는 학생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쫓았다. 나와 그 선생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말은 학생들 사이에 완전히 침투해 있었다. 국어 수행평가를 잘 못 본 것이, 이번 생을 포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 학생은 수행평가를 그렇게 못 본 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취업이나 진학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뿐 아니라 아주 사소한 실패에도 ‘이생망’을 사용한다. 조금만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생망’이고, 다이어트에 실패해도 ‘이생망’이다. 짝사랑에 실패해도 ‘이생망’이고, 티켓팅에 실패하는 것도 ‘이생망’이다.

이 단어는 가벼운 불평에서 진짜 심각한 좌절감까지 폭넓게 쓰인다. 상황에 따라 ‘웃픈’(웃기면서 슬픈) 농담처럼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한 자조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일종의 개그 코드로, 가볍게 웃고 넘기는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또 젊은 세대에서는 이 말의 사용에 대해 꼬투리 잡으며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평가하는 것을 일종의 꼰대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버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버리고, 새로운 ‘나’를 원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불만족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사소한 실패나 좌절에도 이번 생을 포기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내 인생 ‘전부’를 망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볼드처리된 부분은 각주처리입니다.


각주71) "최애(最愛)"는 일본어 사이아이(最愛, さいあい)를 한자 그대로 직역한 말이다. 가장 최(最)와 사랑 애(愛)라는 한자 그대로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뜻한다. 주로 덕질 문화에서 자주 사용되며, 팬이 좋아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애정하는 인물 하나를 지칭할 때 쓴다.


각주72) 조선시대 왕세자가 세자빈의 죽음을 파헤치던 중 현대 서울 옥탑방으로 타임슬립하며 시작된다. 왕세자와 수행 내관들이 현대 사회에 적응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과,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중심 서사로 작용한다.


각주73) 21세기 여성이 고려 시대로 타임슬립해, 황제 계승 전쟁에 휘말린 왕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이야기다.


각주74) 심지어 남녀가 바뀌기도 한다. 『철인왕후(2020–2021)』에서는 현대의 자유분방한 남성 셰프가 사고로 조선시대 중전 김소용의 몸에 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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