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게 억울하다 - 낳음 당했다

[학교용어 TMI의 후일담] 낳음 당한 자식들과 죄인부모 上

by 복희
태어난 게 억울하다 = 낳음 당했다



문법의 구조 역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걸까?


한국어나 일본어는 일반적으로 주어가 문장의 앞부분에, 서술어가 가장 뒷부분에 오는 구조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라고 하며, 중요한 내용이 마지막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사고도 맥락을 충분히 듣고 전체 흐름을 파악한 뒤에 의미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발달했다고 생각한다. 즉, 전후 상황과 분위기,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며 ‘전체를 본 뒤 판단하는 사고방식’이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인 걸까?)


이와 다르게 영어는 주어, 동사, 목적어가 기본 어순이며, 문장의 핵심 의미를 초반부에 빠르게 제시한다. 영어처럼 핵심 정보가 앞에서부터 제시되는 언어에서는, 사고 과정도 주로 핵심 논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뒤에 근거를 덧붙이는 구조이다. 즉, 결론을 먼저 말하고 명확하게 논리를 세우는 사고방식이 언어 구조와 맞물려 강화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한국어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다양한 조사 사용이 있다. ‘A가 국어를 잘한다.’와 ‘A가 국어는 잘한다.’는 조사 하나로 문장의 어감(語感)이 달라진다. 이러한 조사의 사용은 중심 의미가 같아도 다른 어감을 전달하며 미묘한 의미를 더한다.


이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한국어의 맛이다. 이 맛은 색깔을 표현하는 어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어에서는 ‘노랗다’라는 표현을 굉장히 다양하게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샛노랗다, 노오랗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누르데데하다, 누르죽죽하다 등등.


이는 한국어가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언어임을 보여주며, 말의 뉘앙스나 표현의 선택이 사고와 해석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구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 말은 굉장히 섬세하며, 예민하다. (그래서 우리 말은 말꼬리를 잡고 싸우기 좋은 언어이지 않을까?)


그리고 한국어는 주로 생물을 주어로 하는 능동 표현이 익숙하다. ‘그 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읽힌다.’라는 문장은 한국어로서는 어색하지만,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앞의 문장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긴다면,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는다.’가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영어 표현을 번역할 때는 이러한 무생물 주어의 문장을 생물 주어의 문장으로, 수동 표현을 능동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바꾸어야 의미가 잘 전달된다.


한국어 문법에서는 ‘수동’이라는 표현보다 ‘피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둘은 의미도 차이가 있다. 영어의 수동 표현은 동작의 주체보다 동작의 대상이 더 중요하거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할 때 사용하지만, 한국어의 피동(被動)은 ‘당하다(被)’의 뉘앙스를 가진 한자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어가 다른 주체에 의해 동작을 당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국어와 언어 구조가 매우 유사한 일본어의 수동(피동) 표현은 어떨까? 일본어도 우리나라처럼 능동 표현이 주로 쓰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일본어 문법에서는 영어 문법과 같이 수동의 개념이 있으며, 수동 표현이 굉장히 발달하여 자주 쓰인다. 그리고 수동 표현이 ‘수동’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읽다’ - ‘읽히다’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피동 접미사 ‘-이-, -히-, -리-, -기-’가 붙어 피동 동사를 만든다.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사의 형태가 변해 수동 표현을 만든다. 일본어는 동사의 종류가 3가지이고, 각각 수동형을 만드는 방법이 다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일상적인 표현에서 수동 표현이 한국보다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동은이 박연진을 때렸다. 박연진이 문동은에게 맞았다.’와 같이 ‘때리다’의 반의어인 ‘맞다’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일본어에서는 ‘문동은が 박연진を なぐった, 박연진が 문동은に なぐられた’ 와 같이 ‘때리다’라는 동사 ‘なぐる(나구루)’를 수동 표현으로 변형하여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행위자와 대상의 1:1 연결이 가능한 수동을 단순 수동이라 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의어나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도 일본어에서는 수동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어에서 수동 표현은 표현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판단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간접 수동이라고 한다. 어떤 행위가 직접적으로 그 행위의 대상(물건 등)에 가해졌지만, 그 결과로 제3자(사람)가 피해를 입거나 영향을 받을 때 쓴다. 즉, 수동의 주어는 그 행위의 직접 대상이 아니라, 그 결과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동생이 컴퓨터를 망가트렸다.(弟が パソコンを 壊した.)’란 행위에 대해 표현할 때 한국어는 그대로 표현하지만, 일본어의 경우 수동태를 사용하여 동생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즉, 한국어로는 어색하지만 일본어로는 ‘나는 동생에게 컴퓨터를 망가트림 당했다.(私は 弟に パソコンを 壊された.)’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동생이 컴퓨터를 망가트렸다. ↔ 컴퓨터가 동생에 의해 망가트려졌다.’ 같은 표현만 성립하지만, 일본어에서는 행위가 직접 나에게 가해진 게 아니지만, 그로 인해 화자나 누군가가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간접 수동 중에서도 ‘곤란·피해·불쾌감’이 강하게 포함된 수동이 있다. 한국어로는 번역조차도 이상한 ‘비에 젖어졌다.(雨に 降られる.)’라는 표현이 그 예다. 이는 ‘내가 비를 맞아서 곤란하다(불쾌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를 한국어로 표현하면, ‘비 맞아서 짜증난다.’ 정도가 되겠다.


이렇듯 한국어서는 피동 표현의 사용이 잘 사용되지 않고, 접미사에 의한 동사의 형태 변형 정도만 강조된다. 그런데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나 댓글을 살펴보면 심심치 않게 ‘낳음 당했다’라는 말을 볼 수 있다. ‘낳다’라는 동사의 피동표현은 ‘낳아지다’가 있겠지만, 이 자체가 한국어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그리고 ‘낳아지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태어나게 되었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낳음 당했다’라는 표현은 다르다. 마치 일본어의 간접 수동처럼, 낳음이라는 행위 때문에 (자신은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도, 혹은 태어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 표현은 MZ세대가 주로 쓰는데, '태어나기 싫었는데 억지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표현이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되었다는 자조와 함께, 자기 삶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말인 것이다. 번역가 황석희가 말한 것처럼 ‘낳음 당했다’라는 이 기이한 수동 표현은 자신의 존재를 교통사고처럼 자기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외부로부터 가해진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MZ 세대가 자신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인 이유는 태어난 이후의 세상이 바로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혹독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주체인 부모와 나를 혹독하게 대하는 사회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들어 있다.


나의 책 학교 용어 TMI의 마지막 용어 자리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이 이 ‘낳음 당했다’라는 말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다 최종 승자는 ‘이생망’이 되었지만, 이 ‘낳음 당했다’은 말이 요즘 더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역대급 불수능이라고 불리는 2026학년도 수능 시험 이후로 입시 상담 콘텐츠에 흥미가 생겼다. 그런 콘텐츠를 자주 보다보니 댓글에 이런 말이 자주 등장하면서, 미뤄두었던 숙제를 시작하듯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태어난 게 억울한 이유는 3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1. 부모가 나에게 남들보다 지원해 주지 않을 때 느끼는 억울함.


부모가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정서적 안정감을 주지 못하거나, 기본적인 돌봄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할 때, 자녀는 출발선부터 뒤처졌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사교육, 생활 안정, 정서적 지지, 부모의 관심과 시간이 아이의 미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부모의 지원이 부족할 경우 불평등을 더욱 크게 느낀다.


2. 이 사회가 너무 혹독하기에(난이도 SUPER HARD 모드) 오는 억울함.


치열한 입시 경쟁, 낮은 취업 성공률, 비정규직 확산, 월급 대비 턱없이 높은 집값·월세, 사회적 성공 기준에 대한 압박, 복지 부족이 겹치면서, 태어난 순간부터 ‘극한 난이도 게임’을 강제로 플레이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개인의 비관이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현실 인식에 가깝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조건들이 출생과 동시에 주어지고, 그 조건이 세대에 따라 현저하게 불리해졌다는 체감이 강해지면서, 젊은 세대는 자신의 삶을 ‘선택의 결과’가 아닌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결과’로 인식한다.


더욱이 이러한 억울함은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의문으로 이어진다. 젊은 세대의 시선에서 볼 때, 기성세대는 경제 성장기와 사회적 호황기를 통과하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와 자산 축적의 기회를 누렸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제도와 관행은 이후 세대에게 불리한 구조로 굳어졌다.


즉, 좋은 시절의 혜택은 기성세대가 먼저 가져갔고, 그 결과로 남은 부담과 위험은 젊은 세대가 떠안고 있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세대 간 불균형 속에서, 젊은 세대가 자신의 출생과 삶을 억울하게 받아들이는 감정은 개인적 불만을 넘어 세대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장된다.



3. 부모 봉양이나 기성세대를 봉양해야 하는 책임에서 오는 억울함.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자녀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문화적 압박이 강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낮은 임금, 높은 물가, 미래에 대한 불안, 자신의 삶을 꾸리기조차 벅찬 현실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 부모의 노후, 경제적 부담, 의료비, 돌봄 문제 등까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억울함의 중요한 축 중 하나는, 단순히 부모 개인을 봉양해야 한다는 전통적 역할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젊은 세대를 일종의 ‘부양 인력’으로 간주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국가 차원에서 젊은이를 ‘부담을 떠받치는 노동력’으로 보는 것이다. (왜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이 애국자인가?, 이는 인구를 하나의 자원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면서, 사회 전체가 젊은 세대를 세금·보험료를 납부하는 주력 세대, 노년층 복지와 국가 재정을 지탱해야 하는 인구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을 기성세대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한국리서치 정기조사 ‘여론 속의 여론’의 2023년 2월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 중 80%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는 데 동의한다(매우 심각 25%, 심각한 편 55%). 세대별로도 20대(18~29세, 73%), 30대(82%), 40대(88%), 50대(77%), 60세 이상(79%) 등 전 연령대에서 최소 4명 중 3명이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는 데 동의한다.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기원전 59~기원후 17)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 없어'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불성실한 집단으로 치부하고 자신과 다른 별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자기 자식이 되면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다. ‘낳음 당했다’고 울부짖는 자녀 세대의 부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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