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죄

[학교용어 TMI의 후일담] 낳음 당한 자식들과 죄인부모 中

by 복희
부모라는 죄


중학교 1학년 첫 단원은 대부분 ‘시’가 등장하고, 비유나 상징을 가르친다. 그중 학생에게 가장 잘 먹히는 비유의 예시가 바로 이것이다. 위의 비유(은유)를 들어 은유법을 가르치면 학생들은 격한 공감을 표하며 잠깐이라도 수업에 흥미를 보인다.


중학교 1학년 자유학기(지필평가 없음)를 하는 학생들이 뭐가 힘들어서 자신이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지 공감하기 어려운 대(大)꼰대(나를 포함)들은 이 표현 자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지만 지금은 그걸 말하는 곳이 아니니 줄이도록 하자. ‘수학은 누가 만들었을까?’, ‘영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를 고민하며 타임머신이 있다면 적어도 뉴턴이나 피타고라스 정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으니까.


학생들이 학생이라는 무게에 고통받으며, 자신이 죄인처럼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부모는 어떨까? 부모는 학생을 벌주는 간수인가?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지만, 부모 역시 부모라는 죄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꽤 오래전 엄마와 『극비수사(2015)』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현금 부자의 딸이 유괴되면서 경찰(김윤식)과 무당(유해진)이 합심하여 자녀를 찾는 영화인데, 배우의 이름값에 비해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없는 밋밋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그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였냐고 물어보자,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자식은 전생에 빚 받으러 오는 거라고, 하는 말 그게 아주 딱 맞아.”


엄마는 큰 감명을 받은 듯, 그 대사를 두어 번 더 강조했다. 자식 된 자로서 엄마에게 이 말을 들으니 살짝 억울했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자식 아닌가?’, ‘내가 뭐 엄마한테 그렇게 빚 내놓으라는 듯이 한 적이 있나?’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평소에는 어떤 영화를 봐도 공감이나 감동을 하지 않던 엄마가 이 대사에 대해서는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이 반응은 ‘진짜’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극비수사』 중 대사

공길용(김윤석) : 원래가 자식은 부모한테 빚 받으러 온 인연이라 그러지유.

김중산(유해진) : 하기사 자식들 앞에서는 빚진 죄인같이 안 사오?



이 대사는 영화에서 만든 표현은 아니고, 불교의 개념에서 온 말이다. 불교에서 부모와 자식은 8천겁의 인연이 쌓여 만나는 관계다. 또 과거의 인연은 대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인연이거나 빚쟁이가 되어 서로 빚을 받으러 온 인연이라고 한다. 앞의 경우는 존경과 자비심이고, 뒤의 경우는 불화와 증오심이다. (현대불교, 2005)


우리 엄마가 ‘자식은 전쟁의 빚쟁이’라는 표현에 공감했다고 해서 우리 모녀 사이에 불화가 있거나, 서로에 대해 증오심이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그저 게임 캐릭터 육성처럼 뚝딱하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인내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도 부모로 태어나지 않았다. 부모 역시 수많은 고난을 거쳐 부모로서 재탄생하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은 마을이 해체되었고, 가족의 규모 역시 작아져 자녀 양육의 책임이 오롯이 부모에게 전가되었다. 예전에는 골목골목마다 이웃이 있고, 그 골목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루고 놀았지만, 지금은 놀이터에도 부모가 지키고 있어야 하며 우리 집 사정을 터놓고 아이를 맡길 이웃을 만나기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만큼 어렵다. 또, 조부모와 같이 사는 대가족의 경우 부모가 일이나 집안일을 할 때 조부모가 아이를 지켜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욱이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국가데이터처 「지역별고용조사」에 의하면 2023년의 맞벌이 비율 48.2%로, 2022년의 46.1%에 비해 증가하였다. 그리고 세대별로 봤을 때, 2023년 30세~64세의 유배우 가구 중 맞벌이 비율은 57%~58%로 거의 60%에 육박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자녀 양육에서 남성(아빠)의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자녀 양육에 있어서만은 ‘아이에게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라는 엄마 만능(萬能)론이 강하다. 그래서 일하는 엄마는 일과 양육 모두를 해내야 하는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한다. 자녀가 아프거나, 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가 일을 해서 그래.’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 말을 듣지 않더라도 마음 한쪽에는 일로 인해 자녀 양육에 피해가 간다는 죄책감이 있다. 하지만 24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와 체력적 한계로 인해 양육에 빈자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여성(엄마)의 역할이 일정 부분 남성(아빠)에게 나누어졌다. 이전에는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오면 집에서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퇴근 후에도 남성의 몫이 있다. 남성도 여성도 이전보다 삶이 팍팍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건조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같은 가전기기가 발달하였고, 출산장려금, 다자녀 지원 같은 금전적인 지원도 늘었다. 아이 돌봄 휴가, 출산휴가, 직장 어린이집, 아이 돌봄 도우미 같은 제도도 확대되었지만, 자녀를 키우는 부부를 모두 지원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자녀 수는 점점 감소하고, 이제는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의 줄임말로,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갖지 않는 삶을 선택한 부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결혼 자체도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고, 자녀 역시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유교의 영향으로 부모의 책임이 막중하다. 조선부터 내려온 유교 문화는 ‘효’를 강조한다. 이때의 효는 단순히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봉양하는 덕목에 그치지 않고, 부모가 자식을 한 사람의 사회적 존재로 완성시킬 책임을 전제로 한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교육하는 것은 물론, 혼인을 통해 가문을 잇고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까지가 부모의 도리로 여겨졌다.


특히 조선 시대의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가문의 결합이었기에 혼인은 부모가 결정하고 진행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사회의 규범적 예서였던 『주자가례』에서 혼례의 주체를 부모로 설정한 데서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었고, 그 결과 혼례의 준비와 절차 전반은 물론 혼인 이후의 거처 문제 역시 부모의 책임 범주로 이해되고 관행적으로 실천되었다.


물론 집값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요즘 트렌드는 ‘반반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코로나 시기 이전만 해도 결혼을 하면 남자 쪽에서 집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집값은 높아지니 주택 마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남성은 이제 거의 없다. 반반 결혼 역시 혼수에 비해 집값이 턱없이 비싸 이루어진 것이다. 성인 남녀가 합심해서 재산을 모아도 집값을 감당할 수 없기에 결국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지원 유무와 규모에 따라, 앞으로 꾸릴 가정의 소득 지위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부모의 지원으로 집값을 모두 충당하기에는 부족하므로 대출을 받는다. 통계청의 2024년 신혼부부 통계를 보면, 2024년의 대출이 있는 신혼부부의 비중은 86.9%이며, 이 중 3억 이상의 대출을 받은 비율은 24%이다.


물론 요즘은 대출도 능력에 따라 결정되니 대출을 많이 받는 것도 능력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도한 대출로 인한 가계 부담은 신혼부부의 시작에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부모의 지원으로 주택을 취득한 신혼부부는 출발점이 다른 유리한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혼인하여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으면 성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가 결혼해 독립해야 부모의 도리를 완료하였다고 느꼈다.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 전통적인 부모관은 자식의 독립을 위한 부모의 헌신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러한 헌신의 레벨이 점점 높아지는 데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낳음 당했다고 부르짖는 첫 번째 이유가 부모의 지원 부족이라고 적은 것도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었다. 그리고 이 지원은 비단 주택 구매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결혼에 도달하기까지의 학력, 체력, 외모, 성격까지도 모두 부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요즘은 여학생들은 쌍꺼풀 수술은 기본이고, 남학생들은 키 크는 주사를 맞고, 남녀 할 것 없이 치아교정 정도는 해야 한다. 이런 지원은 우리 아이를 남보다 뒤처지게 할 수 없다는 부모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다. 아니, 부모는 판단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예전과는 다른 ‘수시’라고 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입학전형에 대응하기 위한 생활기록부 관리에도 부모의 역할이 필요하다. 대학은 학생이 공부한 대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믿음이다. 물론 부모가 갖은 노력을 한들, 학생이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학생의 노력에 부모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아니 적어도 내가 입시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자녀가 피해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입시 컨설팅이나 사교육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자극한다. 부모가 입시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능력 부족인 것처럼 자극하며 불안감을 조성한다. 학생 또한 많은 선택지 앞에서 망설임이 생기면 부모의 무지(無知)를 탓한다. 그리고 자기 능력 부족이나 노력 부족보다는 부모의 지원을 탓한다.


나를 비롯한 80년대생 이전의 부모는 잘 먹고 잘 입히는 의식주에 대한 지원이 우선이었지만, 지금은 그건 필수고 학생의 학습 코디네이터가 되어 학습 습관 관리, 더 나아가 진로진학 코디네이터가 되어 학생의 소질마저 찾아 개발해 줘야 한다.


‘낳음 당했다’라는 억울함에는 ‘나에게 고작 이 정도 지원밖에 못 해주면서 나를 왜 낳았냐’라는 비난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는 부모의 보살핌이나 지원이 남들에 비해 부족한 것 같은데, 부모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무능력한 부모에 대한 비난도 담겨 있다. 이는 전통적인 유교의 ‘효’사상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유교의 ‘효’는 자식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는 '부부자자(父父子子)'라는 말이 있다. 제나라의 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효는 부모가 부모다워야 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다움’, ‘자식다움’이라는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 부모들은 자기의 부모 세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지원하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부모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 같다. 완벽한 부모가 없기에 늘 자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자녀의 부족함조차도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며 죄책감을 느낀다.



내 책 학교 용어 TMI는 각 장을 마무리한 후 그 뒤편에 동료 교사가 이 장을 읽고 느낀 점을 ‘교사의 뒷담화’라는 코너로 소개했다. 그 중 ‘패드립’(패밀리 드립의 준말, 자세한 설명은 해당 편 참고)에 관련한 부분은 동료 교사가 아닌 학부모님(내 고교 동창의 지인)이 담당해서 그 코너명을 ‘학부모 상담’이라고 지었다.


그중 ‘부모의 사회적·경제적 위치가 학생들에게 중요해진 만큼 학생들 간의 패드립도 늘어나고, 그 말에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흥미로웠다. 부모의 능력이 곧 자녀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계급 세습이 강력할수록, 부모의 역할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즐겨보는 야구팀 유튜브에서 어떤 선수가 어린 자녀를 안고 말했다.


“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살게 할 거야.”


그 말이 부모의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원하는 것을 전부 지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부모의 지원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루고 살게 된다면, 그 아이는 과연 제대로 성장하여 독립할 수 있을까?



에이리 프롬의 「사랑의 기술」(1956)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으로 구분한다.(1956년의 책이니, 부모의 성별로 사랑을 구분한 기준이 적합한가에 대한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여기서는 사랑의 종류로서 각각의 특성에만 주목해 주길 바란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아이는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다. 이 사랑은 아이에게 “나는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다”라는 근원적인 안정감을 준다. 반면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규칙과 기준이 있으며, 성취와 책임을 통해 획득되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이를 보호하기보다 사회로 내보내는 힘이며,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감당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프롬은 성숙한 인간이란 이 두 가지 사랑을 모두 내면화한 존재라고 보았다. 무조건적 사랑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조건적 사랑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배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며,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완전무결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작동한다고 믿는다. 사랑이 지닌 힘이 크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사랑을 지나치게 신성시할수록 사람들은 사랑의 과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랑받았는가’, ‘충분히 받았는가’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랑은 관계 속에서 함께 길러야 할 능력이 아니라, 상대에게서 확보해야 할 자원이 된다.


그러나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랑 역시 하나의 기술인 이상, 배움과 연습, 실패와 수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프롬은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을 감정이나 본능이 아니라 훈련과 성찰이 필요한 하나의 ‘능력’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패할 수 있으며, 때로는 관계를 성장시키기보다 왜곡하고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실패는 사랑의 상실이다. 즉, 연인과 사귀다가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랑은 ‘실패’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모의 사랑은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한 부모의 사랑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실패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프롬은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많다고 기술한다. 사랑이 능력이라면, 그 능력이 미숙할 경우 사랑은 배려가 아니라 간섭으로, 헌신이 아니라 희생 강요로, 보호가 아니라 지배로 변질된다. 다시 말해, 사랑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무조건 긍정적인 힘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 타인을 자유롭게 할 수도, 옥죄일 수도 있는 양면적인 행위인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감각을 심어주는 무조건적 사랑이며, 인간의 정서적 안정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바로 그 무조건성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숭고하면서도 가장 실패하기 쉬운 사랑이 된다. 성숙한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떠나보낼 수 있는 사랑이지만, 미성숙한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붙잡아 두려는 사랑으로 변한다. 아이의 독립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상실로 인식되고, 사랑은 보호가 아니라 감정적 구속이 된다.


이때 어머니의 사랑은 헌신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지배의 형태를 띠게 된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라는 말은 감사의 요구이자 감정적 채권이 되고, 아이는 사랑을 받는 대신 빚을 진 존재가 된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사랑은 겉보기에는 이타적이지만, 실상은 어머니 자신의 불안과 공허를 자녀를 통해 해소하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 가깝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실패와 위험을 제거해주는 사랑은 아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이를 미성숙한 상태에 고정시킨다.


아버지의 사랑 역시 예외는 아니다. 원래 아버지의 사랑은 규칙과 책임, 사회적 기준을 통해 아이가 세상과 관계 맺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이 왜곡되면 조건부 사랑이 된다. 성취하지 못하면 사랑받을 수 없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버려질 수 있다는 메시지는 아이를 끊임없는 불안 속에 놓이게 만든다.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모두 성숙하지 못할 때, 부모는 죄책감과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고, 자녀는 사랑 속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성장한다.


부모의 선택으로 자녀가 탄생한다. 그래서 자녀들은 내 의사에 반해 태어났다며 억울해 한다. 이에 반해 부모는 자기가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렇기에 자녀를 최선을 다해 키울 의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의무가 너무나 무거워 이제 ‘죄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부모의 죄는 아래와 같다.


1. 자녀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자녀를 낳은 죄


2. 자녀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한 죄


3. 계급 세습 구조 속에서 아이를 경쟁에 던진 죄



부모라는 죄란, 자녀를 괴롭히고 싶어서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부모가 되는 순간 사회로부터 자동으로 부과되는 과도한 책임에 가깝다. 부모는 자녀를 낳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 아이가 살아갈 경쟁 사회의 모든 조건을 대신 준비해 주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충분한 경제력, 안정된 정서, 학습 환경, 외모와 체력, 나아가 미래의 주거 문제까지도 부모의 책임이 되었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 안에서 자녀들은 자기가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사회나 부모를 탓하기 바쁘다. 부모는 자기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자녀에게 헌신하면서도 자기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기성세대로서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판적이지만, 그들이 자기 자녀가 되면 안타깝기 짝이 없어 뭐든지 대신해 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부모와 자녀의 결착은 더욱 공고해지고, 자녀와 부모의 독립은 멀어진다. 책임과 집착 아래 관계가 뒤틀어진다.


개중에는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대가만 바라는 부모, 자녀에게 과도한 기대와 지원을 하는 부모, 자녀의 요구를 들어주다 가족의 생계 전체가 흔들리는 부모,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자녀와 같이 사랑의 기형적 형태에도 다양한 변주가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녀도, 완벽한 가정도 없다. 우리의 가정 역시 사랑의 기형적 형태를 조금씩은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부모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되고,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굴레가 부모를 억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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