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용어 TMI의 후일담] 낳음 당한 자식들과 죄인부모 下
인생의 비밀, 운칠기삼(運七技三)
인생의 비밀, 운칠기삼(運七技三)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물론 간접 경험을 통해 사고의 확장을 꾀할 수는 있으나 지능과 시간적 한계에 따라 인간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세대 차이’라고 하는 갈등도 당연하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아래 세대에게 조언하고, 아래 세대는 경험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와 조언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튜브 쇼츠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발견했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세대 top3’라는 쇼츠다.
3위는 1580년대생으로 10~20대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30대에 사르후 전투(조선이 명나라를 돕다 후금에게 크게 패한 전투로 조선은 파병한 1만명의 군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와 이괄의 난(인조반정 이후 공신 대우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반란군이 한양까지 점령하면서 조선 왕권이 크게 흔들렸다.)이 발발, 40대에는 정묘호란을 50대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즉, 일생이 전쟁인 세대라고 할 수 있겠다.(물론 살아 남았다면 말이다.)
2위는 1660년대생인데 이 세대는 10대에 경신대기근, 30대에 을병대기근을 겪었다. ‘기근’이라는 게 단순히 식량이 부족한 정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와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태풍,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국 규모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해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며 식인조차도 처벌되지 않을 정도였다.
1위는 1220년생으로 10대에 몽골침입을 2번, 20대, 30대, 40대에 모두 몽골침입을 당했다. 몽골군은 10살이 넘는 남자들은 모두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비로 끌려갔다.
인간이 자신이 태어날 시대와 부모를 고를 수 있다면 어떨까? 과연 누가 부모로 선택되고, 어느 시대를 선택할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의 발달로 부모가 자녀를 선택할 수는 있겠으나(윤리적으로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부모가 자녀에게 “이번 생에 저의 자녀로 태어나겠습니까?”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가 부모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닌 숙명이다. 아니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은 언제, 어느 곳에서 태어날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야만 하는 사람도 그 이유가 없으며, 학교에서 매일 무상으로 제공되는 급식이 음식물쓰레기가 되어 버려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무슨 일이든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를 파악해야지만, 내가 완전히 이해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도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는 소명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하며, 자존감이 되기도 한다. 또 반대로 그 이유가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법의학자 유성호는 그의 저서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2019)」에서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생명 탄생에 대한 과정이 거짓임을 설명한다. 나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으면서 “수많은 정자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뛰어난(즉, 가장 빠른) 하나가 난자에 도달해 수정된다”고 배웠다. (1980년대 생은 알 것이다. 낙태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 학생들을 공포에 떨게 한 그 성교육을... 특히 아기가 낙태되지 않기 위해 집게를 피하는 장면과 그 신체가 망가지는 장면을 보며 낙태는 살인이라고 교육받지 않았는가. 지금 이런 장면을 중학생들에게 보여주면 아동 학대로 신고받을 것이다.)
이 설명에는 경쟁에서 승리한 ‘최강자’, ‘선택받은 존재’라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덧붙는다. 이렇게 태어난 ‘나’는 존귀하고 귀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내용은 교과서적 ‘미화된 수정’ 서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생물학적 과정에서 정자는 각자 독립적으로 경쟁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수정은 ‘최고의 정자’가 승리하는 과정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자가 소모되고 희생되는 과정에 가깝다. 수천만 마리의 정자 중 절대다수는 여성의 생식 환경 속에서 사라지며, 일부는 난자를 둘러싼 보호막을 녹이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마지막에 도달한 하나는 가장 우수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운이 좋았기 때문에 수정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믿어 온 “나는 선택받아 태어났다”는 관념이 과학적으로도 얼마나 허약한지 지적한다. 탄생은 능력의 증명도, 정당한 승리의 결과도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소멸 위에 우연히 성립한 사건이다. 그래서 생명의 시작에는 영광보다 우연성, 필연보다 불확실성이 더 짙게 깔려 있다.
이 설명은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있고 값진 성취”라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오히려 태어났다는 사실은 선택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건은 다른 정자들의 희생으로 일어난다. 내가 수정에 성공한 이유는 내가 다른 정자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위치한 순서가 수정이 되는 순서였고, 운이 좋았거나(태어나 보니 삶이 괜찮았을 경우), 나빴기 때문(태어나보니 삶이 시궁창일 경우)이다.
생명 탄생의 민낯을 알게 되니 어떤가? 나의 탄생이 그저 우연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가? 내가 이 책을 읽고 놀랐던 점을 초등학교 보건 선생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은 실제 생명 탄생 과정은 위와 같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잘 먹히는(?) 이야기는 내가 배웠던 이야기라고 말했다. 나는 태어나야만 했던 소중한 존재라는 스토리가 학생의 자존감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fact)이라면 내가 배운 내용은 진실(true)에 가깝다.
먼저 fact는 말 그대로 경험적·과학적 사실이다. 정자가 경쟁에서 ‘우승’해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희생과 우연 속에서 하나가 선택된다는 설명은 생물학적 팩트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탄생은 필연이 아니라 확률의 결과이며, 누구도 “태어나야만 했던 이유”를 생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반면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야기는 사실의 정확성보다는 의미의 전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태어날 가치가 있어서 태어났다”는 서사는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 교육적·윤리적 진실, 즉 true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전 세대는 ‘개인’보다는 집단이 우선이었다. 개인보다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직장과 국가를 위해 개인은 소모되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에서 발간하는 「열린 정책」의 2021년 6월호에서 서울대 사회학과 임동균 교수는 지금의 키워드를 ‘성스러운 개인’이라 칭했다.
그 칼럼에서 교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발전된 산업 사회에서 나타나는 청년들의 모습은 매우 개인화된 삶과 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개인’이 성스러운 대상이 된 시대에서 개인의 취향, 열정, 정체성, 권리 등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며, 개인들은 이런 가치들을 새로운 세속 종교로써 받아들이고 절대화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전기(Biography)의 저자이자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해진 ‘나(개인)’라는 개념이 오히려 절망과 체념의 원인이 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귀한’ 내가 ‘누추한 곳(헬조선)’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도전보다는 회피와 원망을 선택한다. 부모 세대 역시 자녀의 실패가 본인의 실패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자녀가 어떻게 해서든 실패하지 않도록 원조하는데 사력을 다한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진로 탐색 시기를 선사하는 자유학기가 전면 시행되면서 나는 이런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은 진로 탐색이라는 원래의 취지보다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완충기, 시험을 치지 않고 중학교에 적응하는 시기 정도로 전락한 것 같지만 초기의 자유학기는 달랐다.
자유학기제는 한 학기 동안 지필고사를 치르지 않고, 대신 진로 탐색, 체험 활동, 토론·프로젝트 수업, 예술·체육·동아리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특히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초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성적 경쟁 대신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자기 이해를 넓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자유학기제는 성적을 잠시 유예함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에 흥미가 있는가”를 고민할 여유를 주려는 제도적 실험인 것이다. 즉, 자아 성찰을 통한 진로 탐색이 가장 큰 주제였다.
자유학기제의 초기 시행 당시에는 중학교부터 ‘본인 진로 희망’, ‘학부모 진로 희망’, ‘희망 사유’가 학교생활기록부에 들어갔는데, 이걸 조사할 때부터 위화감이 느껴졌다. 학부모님은 남학생들이 희망하는 ‘소방관’이나 ‘경찰’ 같은 직업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셨다. 학생들이 비교적 관심을 가지는 요리, 제빵, 미용 같은 직업은 돈벌이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탈락되었다.
학생들의 진로 희망은 교사나 과학자, 의료계, 법조계 같은 그럴듯한 직업이 적혔다. 간혹 학생 본인 희망 직업을 적었으나 이 경우는 부모님의 희망과 일치하지 않았거나, 부모님이 자녀의 학교생활기록부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진로 ‘희망’이니까 그럴듯한 직업을 당연히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는 많은 역할이 있다. 자동차를 하나의 사회로 생각한다면 모두가 엔진이나 운전석이 될 수 없다. 개중에는 와이퍼도 필요하고, 안전띠를 고정하는 작은 나사못도 필요하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사람은 엔진이 되기보다는 자동차를 지탱하는 작은 나사못이 될 확률이 더 높다.
엔진만 있다고 자동차가 아니듯,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나같이 귀한 존재가 나사못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사못 없이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이 되느냐의 진로 교육보다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진로 교육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가 나는 “엔진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진로 희망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노력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력 역시 타고난 재능의 하나일 수 있으며, 뛰어난 재능도 환경에 의해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위대한 자신을 꿈꾸지만, 그걸 이루는 사람은 결국 소수이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앞날을 알 수 없으며, 탄생이 그러했듯 ‘우연한 사건’의 결과로 인생의 전환이 일어나 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노력한 만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살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끔은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도 있다. 그리고 내 노력에 의해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나의 노력으로만 성취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지않는가.
이 땅에 태어나 자녀로서, 젊은이로서 학업과 취업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탄생 자체가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라면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내가 왜 이런 국가에, 이런 부모에, 이런 모습과 재능으로 태어나야만 했는지에 집착해봤자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연에는 이유가 없으며, 그렇기에 우연이다. 원망도 억울함도 이유가 없는 것에 가질 필요가 없다. ‘낳음 당했다’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우연히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명랑하게 살 것인지 고민하자.
자녀를 키우는 것이 너무 어렵고, 정답이 없어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는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 맺어진 인연이며 당신은 자녀의 창조주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창조주였다면 나의 단점과 배우자의 단점 같은 것은 절대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자녀의 고통 역시 부모의 부족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생명이 가진 불확실성의 일부이며, 그것은 부모가 대신할 수 없는 자녀(다른 생명)가 가진 고유의 몫이다.
결국 부모와 자녀는 서로에게 죄인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그저 수많은 우연이 겹쳐 이 혹독한 세상에 함께 던져진 동료일 뿐이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이렇게까지 괴로워진 이유는, 누군가가 잘못해서라기보다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며, 너무 깊이 기대해 왔다. 결국 필요한 것은 희생의 미화가 아니라 건강한 거리두기, 다시 말해 덜 얽히고 덜 요구하는 관계일 것이다.
서로 간의 너무 큰 기대도, 몰입도, 책임도, 어쩌면 사랑조차도 조금은 줄여보는 것이 어떨까?
매콤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서도 원망보다는 조금 더 너그럽게 생각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