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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은 Oct 31. 2021

공항의 하루살이

공항동 카페에서


   네시. 먹먹한 새벽을 사정없는 알람이 망쳐놓았다. 30분만 더 잘 수 있다면. 아니 5분만이라도. 오늘도 직장인의 새벽 기도문을 속으로 왼다.


   난 공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공항 근무자들처럼 스케줄 근무를 하고 있다. 또 스케줄 근무를 싫어한다. 사실 근무 자체가 싫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다. 내가 유달리 반동적인 인물인 탓은 아니다. 여태껏 출근이 좋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있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아마 그가 내 친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온몸이 무겁다. 술을 조금 마시긴 했지만 그 때문은 아니다. 나의 새벽을 끔찍하게 만드는 원인이 따로 있나 싶었던 때가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잠들어 보기도 했고, 피로에 좋다는 영양제를 집어삼키고 자보기도 했다. 9시 뉴스가 시작하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어도 보았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은 이러나저러나.


   생각해보면 새벽 네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는 과정이 상쾌할 하등의 연유가 없다. 깨달음을 얻은 후론 근무 전날에도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 숙취나 피로나 피차 잘 구분이 가지도 않았고, 몽롱한 채 출근하는 편이 엿같은 마음을 다스리기엔 차라리 좋았다.


   눈을 찌푸린 채로 팔을 휘둘러 머리맡의 전화기를 찾았다. 대충 구겨놓은 맥주 캔들이 손에 스쳐 짤랑거렸다. 알람을 해제하고 전화기를 밀어놓았다. 암전. 이때의 적막이 참 버겁다. 절로 나오는 욕을 뱉으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고는 공항까지 택시를 타게 될 공산이 크다. 경험을 통해 배웠다.


   불을 켜는 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다. 나는 잠자리에서 옆으로 구르면 바로 현관에 다다르는 작은 방에 살고 있는데, 좁디좁은 화장실에는 LED 전구가 지나치게 많이 박혀 있다. 공사가 끝나고 남는 전구를 여기다 전부 달아놓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직 채 깨지도 못한 내게는 이만한 폭력도 없다.


   아니 됐다. 사실 이 시간에 기어나가야 하는 내 처지가 문제겠지. 세상 어디로 여행을 보내준대도 이 시간에 출발하느니 난 잠을 더 자겠다. 하물며 출근이라니.







   주말인데 뭐하냐?


   일하지 새끼야. 친구라는 족속들이 으레 이렇다. J는 기가 막히게 내가 공항에 있는 날만 골라 전화해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이 주말이었나.


   스케줄 근무를 하다 보면 날짜 감각이나 요일 감각이 금세 희미해진다. 이는 교대 근무자나 백수들의 직업병 같은 것이다. 나는 두 분야 모두에 조예가 깊기에 남들보다 이 병에 훤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오늘이 평일인지 주말인지, 내일이 며칠인지 하는 일들이 더는 중요치 않게 된다. 알 필요도 없고.


   내게 달력은 부지불식간에 의미를 상실했다. 달력은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교대 근무자들을 위한 달력이 따로 있고, 이를 보통 스케줄표나 근무표라고 부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약속을 잡을 때도 달력보다는 근무표를 들여다보는 일에 훨씬 익숙해졌다.


   근무표에 따라서 흘러가기 시작한 내 삶은 일하는 날과 아닌 날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주말만 바라보듯, 나도 휴무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단지 내가 바라보는 휴일은 평일이 될 수도 주말이 될 수도 있었을 뿐이다.


   일을 시작한 후로는 공휴일이나 명절을 그답게 느끼기도 힘들었다. 의미 없는 공휴일에 신경을 써본 일이 없다. 차라리 내 관심사는 이번 주엔 과연 이틀 연속 휴무가 있는지에 쏠렸다. 괜히 기대를 하다 실망하느니 그나마 현실적인 행복을 희구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돌아보면 그 누구보다 무디게 크리스마스를 흘려보낼 수 있었다는 점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차츰 스케줄에 적응해가는 것은 근무자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다. 주말에 만나자가 아니라 쉬는 날이 언제냐고 묻기 시작하고, 오늘 퇴근이 오후 세시냐 열시냐 묻기 시작하는 식이다. 누구는 그들의 이해심이 커졌다 하겠으나 내게는 나와 사람들 사이에 그만큼의 시차가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외국에라도 사는 듯했다.


   어쨌든 J는 금세 익숙해졌다. J는 전화의 첫마디를 떼는 법을, 그러니까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법을 누구보다 먼저 익혔다.


   야 주말인데 일하냐?




   교대 근무를 하다 보면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딱히 달력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도. 다음 근무자들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리는 삶. 그저 하루를 버티며 다음 휴무를 기다리는 삶. 그리고 일반 직장인들보다 잦은 횟수의 월요병이 반복되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는 공항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그러니까 하루살이목 공항하루살이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스케줄 근무의 경이로운 점은 출근하는 날뿐만 아니라 출근시간도 다양하다는 것에 있다. 출근시간이 다양하다는 것은 꼭 유연 근무제 따위의 자율적인 근무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마다 교대 근무자들의 출근 시간이나 근무 패턴은 다양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율이라는 단어가 거기 들어갈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잠이 많아 오전 근무를 특히 싫어했다. 오전 근무는 새벽 여섯 시쯤 시작했는데,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새벽 네 시 이십 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나도 내가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네시까지 술을 마시면 마셨지.


   어쨌든 하루살이 치고는 제법 이른 시간에 활동을 시작하는 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일찍 일어나는 벌레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나 스스로가 일찍 일어나도 너무 일찍 일어나는 벌레였다고 생각한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일찍 잡아먹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남들보다 이른 기상에 그나마 있는 장점이라는 것이 딱 이 꼴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간부터 느낄 수 있다는 것. 퍽 조숙한 사람, 아니 퍽 조숙한 하루살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야간 근무나 교대 근무가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기사를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저 세상에 힘들게 사는 사람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내가 교대 근무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이제 보니 조만간 내게 병든 하루살이라는 타이틀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작은 내 방에서는 잊을만하면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들이 어디선가 생겨난다. 창문을 닫아두고, 애써 청소를 해봐도 마찬가지다. 그 날벌레들이 사실은 한 마리였던 게 아닐까 상상했던 적이 있다. 한 마리의 하루살이가 윤회를 통해 내 방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영원한 동거인이랄까. 죽어서 다시 내 방에서 태어나고, 다시 죽고 또 태어나고. 월세라도 같이 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사실 이건 내 얘기가 아닐까. 죽지 못하는 공항의 하루살이로 하루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게 내가 아니었나. 나는 하루살이이자 시시포스인 셈이다.


   억울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신을 화나게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기억은 없고, 아무리 높게 쳐줘도 그만치 비중 있는 인물이 될 리도 없다.


   다소 억울하지만, 달리 방도는 없다. 공항에서 일을 시작한 후로 나는 예전보다는 자못 경건한 마음을 담아 복권을 사게 됐다. 인샬라.


   아, 내일은 또 출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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