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 버스

2026년 2월의 일상

by 김여수



2026년 2월이 됐다.


변한 것은 별로 없고, 하루는 여전하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다. 회사는 여전히 지루하고, 여전히 고루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50번 버스 기사들은 여전히 버스가 부서져라 차량을 몰아댄다. 우리 회사는 유달리 고루한 사람들을 골라 채용하고, 버스 회사는 운전을 특히 난폭하게 하는 사람들을 선별해 뽑는 것 같다. 엉뚱한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하긴 나도 그 덕에 일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팀장이 입을 열면, 놀란 토끼가 귀를 쫑긋 하듯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을 회사에서 보곤 한다. 그들은 그의 말에 집중을 하고 있노라고 온몸으로 말하듯 열정적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슬프기도 웃기기도 하다가, 과연 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입을 열면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놓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겠구나, 보지 않아도 훤해지는 풍경에 내 입이 썼다. 같은 회사에서도, 파티션 하나 차이로 사람들의 운명은 제법 달라지는 것 같다.



새벽에 운동을 마치면 요즘은 맥모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있다. 체육관을 나와 30초만 걸어가면 맥도날드가 있다. 시키는 메뉴는 늘 같다. 베이컨 에그 맥머핀에 해쉬브라운, 그리고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질리지 않느냐고 아연한 듯 물어보는 사람들이 이따금 있다. 나는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고, 입으로 꺼내지는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부산을 여행하던 중에 간만에 기네스 생맥주를 마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이 나길래, 이번 달은 흑맥주를 많이 마시기로 했다. 기네스 캔을 제대로 마시려면 반드시 적절한 잔이 필요한데, 나는 도요 사사키의 우스라이 텀블러를 선택했다. 이름이 헷갈리지만, 그 유명한 쇼토쿠 글라스의 우스하리 와는 다른 물건이다. 우스라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우스하리는 상대적으로 비싸며, 우스라이도 충분히 얇지만, 우스하리는 놀랍도록 얇다.



나는 물건을 곱게 다루는 편이 아니고, 특히 유리는 나와 궁합이 영 좋지 않다. 가끔가다 와인 병도 깨 먹곤 하는지라, 도저히 얇디얇은 우스하리는 들일 자신이 없었다. 유리가 깨지는 장면을 상상하면 나는 늘 어깻죽지가 굳는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 손을 벨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설거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깨진 유리 조각을 불안한 마음으로 치워낼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한없이 막막해진다. 청소가 끝나고도 나는 얼마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발을 뗄 것이다.



잔도 샀겠다. 한동안 아일랜드 사람처럼 기네스를 달고 살았다. 변한 것이 별로 없는 삶을 살았으나, 굳이 지난달에 비해 변한 것을 꼽아보자면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적절한 각도로 잔의 내벽에 술을 흘려보내는 것, 얇은 림위로 느껴지는 감촉이나 잔을 그러쥔 손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운 온도, 따라놓은 술의 거품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색상을 감상하는 일까지 새로운 잔에는 여러 가지 다른 경험이 한데 딸려온다. 그렇기에 잔을 사면 한동안은 그 잔에 어울리는 술을 찾게 되는 법이다.



이번 달에는 주로 기네스를 마셨지만, 화수 브루어리의 바닐라 스타우트를 탭으로 마시기도 했고, 파운더스의 포터를 마시기도 했다. 간만에 포터를 마시고 나니,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나는 스타우트보다는 포터를 선호하는 타입의 인간인 듯하다. 스타우트의 묵직함도 좋지만, 아무래도 포터의 가벼움이 내게는 경쾌하고 마시기 편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파운더스의 포터가 지나치게 훌륭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 향이 지배적인 가운데서도, 밸런스를 잃지 않았고, 적절한 탄산감이 느껴지는 맥주 위로 자리 잡은 짙은 밀도의 거품까지, 무척 잘 만든 맥주였다. 마시면서 나는 연발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예전에 한창 다니던 술집에서 풀러스의 런던 포터를 자주 마셨다. 술집의 이름이나 런던 포터의 정확한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D와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가게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날만 기억이 난다. 기억은 흐릿해도 맥주는 분명히 맛있었고, 담배를 피우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늘 그랬듯 우리는 맥주를 여러 병 비웠고, 바깥공기를 여러 번이고 쐤다. 이제 D는 아빠가 됐고, 나는 담배를 끊었고, 아침에 침대를 벗어나기가 예전보다 버거워졌다. 특히 술을 마신 다음날은 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조금씩 가라앉는 맥주 거품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설에는 고향에 다녀왔다. 한때는 서울에서 나와 같이 살던 고양이는 이제는 나와 서먹해졌다. 늙은 자식을 둔 부모의 얼굴도 많이 변해있었다. 치타는 내가 발톱을 깎는 것까지는 허락했지만, 내 옆에서 잠을 자려 들지는 않았다. 새벽, 지나치게 몸을 치대다가 안방에서 쫓겨난 치타는 문을 열어달라 시위를 벌였다. 노모의 옆에서만 잠을 자게된 노묘의 모습을 나는 문 너머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집에서 윙윙거리는 냉장고 소리 사이로 치타의 울음소리가 들리다 말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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