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소금길 염두고도鹽豆古道 기행

지리산 소금길 염두고도 탄생

by 김용근

지리산 소금길 염두고도 탄생

지리산 소금길이 콩과 소금이 오가는 염두고도가 되다. 그 이야기의 시점은 1500년 전 가야 기문국 사람들의 콩물 새참 구전이다.

지리산 운봉 고원 가야 기문국의 대표 유적지인 고분군은 남원 아영 두락 마을과 남원 인월 성내마을의 경계점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40 여기가 넘는 고분군과 두락이라는 마을 이름은 무슨 상관성을 가졌을까?

큰 사찰을 짓고 나면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이 남아 마을을 이룬다.
비슷한 이유를 들이댄다면 두락 고분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렇다면 두락이라는 마을 이름과 고분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그 이야기를 풀어볼 단서는 100세에 가까운 이 지역의 어르신이 들려주는 구술내용에 있어 보인다.

오래전 지리산 일대 구술자료 채록 중 남원 아영면의 조사 내용 중에 "산일에는 콩물 새참만 한 게 없다"는 그 이야기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산일이란 묘 쓰는 힘든 일이다.
산일 많은 데서 사는 사람들 그래서 콩물이 힘든 산일에 기력을 냈던 음식을 가진 두락 고분의 이야기이다.
산일을 하는 데에 휴대도 간편하고 짭짤하고 고소하며 영양도 많은 콩물은 지리산 소금길이 염두고도가 되게 했던 문화적 교량이다.

지리산에 콩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마을 이름이 변하여 두락(斗落)리가 되었다.
그 마을의 유래는 콩 이야기로 시작된다.

1500여 년 전 지리산 깊은 요새에 들었던 가야 기문국 시절 지금의 남원 아영 두락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 마을이었다.
힘센 두 나라의 공격을 당할 때마다 남자들은 싸움터에 끌려갔다.
농사일은 여자들의 몫이 되었고 해 걸러 흉년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고사를 지냈다. 신통하게도 콩 농사만이 풍년이 들었다.
콩은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던 가야 기문국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콩 두(豆)’자와 물 이름 락(洛)’자를 써서 ‘두락’이라 했다고 한다.
수 십 년이 지났다. 또다시 흉년이 들었다. 이번에는 두락 고분 윗마을 유곡 뒷산 절에 계시는 부처님께 빌었더니 ‘콩 두’ 자를‘말 두(斗)’자로 고치면 풍년이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연유로 두락(斗洛)으로 고쳐 불렀다가 두락(斗落)으로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콩 이야기를 가진 마을이다.

지리산 깊은 천혜의 요새, 하늘이 숨겨 놓았으나 백성이 찾아내 삶터가 된 곳, 조선에 이르러서는 십승지에 든 그 고을에 콩과 소금 이야기를 가진 오래된 길이 있다.
어른들이 불렀던 염두고도의 길이다. 그 길에는 지금도 간장소와 소금장수 무덤 같은 실체의 흔적이 있고 그 길의 시점은 전라도 남원 두락이고 종점은 경상도 하동 화개다.

콩과 소금 그 이야기의 속살은 1500년 전 가야 기문국 사람들의 생활문화에 끈을 대고 있으니 지리산 북서쪽 계곡의 간장소와 두락의 이름에 든 것이 그것이다.

오래된 소금길에 놓인 간장소와 콩 이야기의 속살은 역사 속의 문화적 음식이다.
1500년 전 지리산 깊은 고원에 들었던 가야 기문국 사람들은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소금을 가져왔다.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두락 마을은 가야 고분군의 집 성지다. 그곳에 콩이 풍성했다는 것은 콩을 재료로 한 음식이 생겨났다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했던 소금까지 합하여졌으니 콩물과 마을과 고분군은 가야 기문국의 큰 이야기 뿌리다.

콩과 소금 거기에 토기 항아리를 옆에 두었으니 된장과 간장이 생겨났으리라는 생각을 낸다면 간장 된장을 반찬으로 가져가다 빠트렸다는 지리산 소금길의 간장소는 염두고도의 정체성이다.

고분을 만들면서 콩물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콩물 먹은 힘센 사람들이 사는 곳에 고분을 만들게 되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 속 이야기이다. 그러나 한 곳에 집성된 40 여기의 고분이 그 문화적 답을 가졌을 것이다.
고분에는 유물보다 더 크고 문화재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 소금길로 가져온 소금은 오랜 세월 동안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지리산에서 자라는 붉나무에서 소금을 얻어 생활을 했다.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는 오배자 나무라고 불렀으며, 가을이 되면 이 열매껍질에 생긴 짠 성분을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사용하게 될 소금이 필요하여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화개장터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야 하는 수고는 날마다의 고민이었다.
지리산의 소금 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조선시대 운봉 사람들은 조상들처럼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과 화개재를 넘어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으로 교환해 왔다.
화개장터의 유명했던 서리태콩 두부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었다.
삼십 명으로 이루어진 운봉 현의 소금 무 데미 들은 지리산 소금길을 넘나들면서 소금과 서리태 콩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 소금 무 데미 선창 꾼은 훗날 동편제 소리꾼이 되기도 했다.
지금 지리산 소금 길에 놓여 있는 간장소, 소금장수 무덤 같은 흔적과 하동댁과 운봉 댁의 소금장수 이야기는 지리산 염두고도의 정체성이다. 중국의 윈난 성을 지나는 차마고도 보다도, 더 사람 냄새난다는 한국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가 지리산에 있고, 그 출발지 운봉 현은 십승지지의 한 곳이기에 충분한 고을이었다.


사람 살기 좋은 고을은 생태적인 자연환경에 앞서 공동체 속에 든 사람 모두가 존재로 선행인 튼튼한 인문적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금길이 염두고도가 된 것은 사람살이 유전자의 진화였다.

FB_IMG_1601433681364.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리산 소금길 염두고도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