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상을 키우면 두 세상이 되고 세 세상이 되고 자꾸 커져서 내 세상 천지가 될 줄 알았다 친구도 이웃도 동료도 선배도 가족도 내 세상의 디딤돌 삼아 높이 앞으로 그렇게 오르고 달렸다
이제 고지가 저기다 싶어 둘러보니 고지에 다다르지 않은자가 없다 내 세상도 남들처럼 시간에 끌려 왔을 뿐이다 남들은 지고온 짐을 고지 앞 장터에 풀어낸다 저마다의 세상을 말이다
착한 농부의 보따리 속에는 이웃사촌이 있다 가난한 시인의 보따리에는 죽어가는 암환자가 마지막 품은 희망의 시집이 있다 말단 공무원 보따리에는 민생을 살피던 공심이라 쓰여진 낡은 삽한자루가 있다 조금 일찍왔다는 젊은이는 장기기증 보따리를 펼친다 민주열사의 보따리도 보이고 공익제보자의 보따리도 보인다 제자를 사랑했던 선생님, 폐지 수레 할머니 장학금 보따리, 신문방송에 안나와 낮설은 선행 보따리, 온 세포가 나라 걱정하던 의원 보따리도 보이고 그렇게 끝없는 장보따리가 열린다
두 세상 세 세상을 지고온 자들이 여기저기에 떠밀려 틈새자리에라도 짐을 풀어 내보려 하나 자리가 없다 모두가 자격자에게만 주어진 사전 예약석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장터 관리인은 자리세를 받고 고지 통행권을 준다 나는 이곳에서 불법 체류자다
이제 어찌하랴 모두는 가져온 짐을 이 장터에서 다 팔고 고지를 향할 것이다 나는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저 고지에 오를 새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