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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y 14. 2018

교환학생을 의무화하면 좋겠다

2018년 4월 30일

리투아니아의 두 번째 큰 도시인 카우나스의 VMU에는 학기마다 15명에서 20명 사이의 한국 교환학생들이 온다. 협정 맺은 한국 대학도 11곳이 되었다. 한국과 학생 교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 비해 빠른 확장세다. 카우나스의 다른 대학인 KTU(카우나스 공대)에도 몇 명씩 온다. 카우나스에만 학기당 한국 교환학생이 스무 명이 넘는 셈이다. 빌뉴스는 더 많아서, 빌뉴스 대학교에만 학기마다 20명 가까이 되고 MRU(미콜라스 로메리스 대학)와 다른 작은 대학들까지 합치면 3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학기 또는 일 년 교환학생을 온다. 모두 학부 학생들인데 3학년이나 4학년이고, 남학생들은 군대를 마치고 오는 경우가 많다. 졸업을 한두 학기 남겨놓고, 이제 돌아가면 '취준생'이 되니 그전에 대학생활을 마지막으로 불사를 자세를 갖춘 학생들이다.

카우나스 중앙 보행자 전용 거리인 자유로의 봄맞이

VMU에 오는 교환학생들은 내가 숙소로 머물던 국제기숙사에 모여있어서 오가는 길에 자주 마주쳤다. 3월 초 아시아 주간 행사 계기로 얼굴이 익숙해진 학생들과 종종 인사하고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 때도 이렇게 활력이 넘치고 뭐든 해보려는 의지가 가득했었나?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에너지를 얻었다. 각자 경험과 여행에 적극적인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젊음이 좋구나 하며 뿌듯해하고 있으니 스스로 나이 먹었음이 더 실감 나기도 했다. 내 또래 중에서는 비교적 체력도 좋고 잘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학생들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대학 시절이 벌써 20년 전이고, 그때는 지금 학생들처럼 다양한 국제 경험 기회가 있지도 않았으며 정보도 부족했다. 석사, 박사 과정 중에 반년씩 나간 것도 미국뿐이었다. 어떻게 리투아니아로 교환학생을 왔냐고 물어보면 교환학생 가능 국가 리스트에서 학교와 커리큘럼, 위치, 환경, 물가, 영어 소통 수준,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까지 비교해서 결정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우나스 음악극장 앞 공원의 봄날

많은 선택지 중에 발트 지역의 리투아니아를 찾아내고, 진짜로 오고, 불편한 점이 많은데도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고, 현지 학생들과도 잘 어울리고, 학생 클럽이나 자원봉사도 찾아서 경험을 늘리고, 열심히 검색해서 유럽 전역으로 여행도 다닌다. 영어가 잘 안 되어 힘들다면서도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에 어른들이 '열정과 패기'를 말할 때마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딱 맞는다. 누가 시킨 것도 없는데 짧은 기간을 채워가는 모습이 그저 예뻐 보였다. 교환학생 중에 한국에서 오케스트라 동아리를 하던 학생이 있었는데, 전공은 아니지만 이곳 음대에 문의해서 교수에게 레슨도 받고 전공 학생들의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함께 하기도 했다. 여행이나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서로 개성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잘 뭉쳐서 진행한다. 한국에서 느끼지 못한 대학 생활의 여유와 낭만을 여기서 찾아내겠다는 듯,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해서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누가 시키는 걸 딱 맞게 잘하는 학생을 모범생으로 친다. 거기에 부합하려다 보면 시키지 않는 걸 해볼 여유가 없다. 풀어놓으면 이렇게 알아서 잘하는 능력자들인데 왜 그리 힘들게 줄 서기를 시키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러시아 정교회였다가 가톨릭 성당으로 바뀐 성 미카엘 대성당. 정교회당을 의미하는 '소보라스'로 더 많이 불린다.

유럽도 국가마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이곳은 일단 학점에 대한 집착이 덜하다. A, B, C가 아니라 10점 만점에 5점 미만이면 낙제다. 즉 Pass/Fail 체계다. 물론 점수도 기록이 남으니 10점이 제일 좋겠지만 대다수가 Pass만 하면 크게 개의치 않는다. 대신 학생들은 밖에서 일을 하거나 클럽, 취미 활동에 더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자기만의 사고와 생활 방식을 뚜렷하게 만든다. 물론 공부를 하기로 선택한 학생들도 있고 성적이 월등한 그룹이 확연히 구별된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대접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한국의 대학은 지나친 학점 경쟁 탓에 변별력을 극대화하고, 학생들의 불만과 다툼의 소지를 없애고자 거의 객관식에 가까운 (또는 아예 객관식으로) 시험을 내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 에세이 형식으로 시험을 쳤더니 한국 교환학생들이 그런 방식을 어색해했다. 영어 라이팅이 문제가 아니라 문장과 문단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논술 형식 자체가 생소한 거였다. 한 번도 논술 형식으로 시험을 본 적이 없다는 학생도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대입 준비와 별반 다르지 않은 줄 세우기를 하면서 그저 말로만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있으니 참 억지스럽다. 


한국 교환학생 중에 내 수업을 듣는 학생도 있었는데, 수업에 한국 학생이 있으면 괜히 영어 설명도 더 긴장되고, 내용도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간혹 한국어로 만나면 언어의 특성상 교수-학생의 위계가 재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이 아니고 학과 지도교수도 아니었으므로 후배들과 이야기할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나이가 훨씬 어리고 그 시기에 맞는 고민들을 하고 있다. 3, 4학년이면 학부에서는 고학번 선배다. 여기서는 객지 생활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나름대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나만 편한 것이었을 수도 있긴 하다.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나도 더 적극적으로 잘 지내봐야겠다는 도전을 받는다. 

빌뉴스 문학의 거리 골목 진입로

학생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한국의 전형적인 삶에서 벗어난 모습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두렵기도 했다. 어찌 보면 대학교수는 초중고교 선생님보다 인간적으로 존경받을 이유는 없는 자리다. 박사과정 지도교수라면 졸업 후에도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니 '스승과 제자'가 되지만 그 외에는 수업만 들을 뿐,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처럼 매일같이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수업을 통해 사고와 안목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코치 역할일 뿐이다. 객지에서 객원교수라는 부담 없는 타이틀로 만난 덕분에 대화도 편하게 하고 매우 개인적인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만났다면 수업을 최우선에 두거라 했겠지만, 여기서 조언은 (수업은 낙제만 하지 말고) 여행을 더 다녀라, 체험할 거 생기면 더 해봐라, 이런 쪽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직장이든 결혼이든 이렇게 장기간 여유를 가질 기회가 희박해지니, 빚을 지더라도 여행을 다니라는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여행 다녀오면 파산할 것 같아요", "많이 다녔더니 여행도 지겨워요" 같은 엄살에도 나중에 후회할 테니 더 다니라고 응원해주었다. 


리투아니아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행의 범위를 더 넓게 잡게 된다. 저가항공을 잘 검색하면 매우 저렴하게 영국부터 서유럽 전체, 북유럽, 러시아, 북아프리카, 터키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까지 효과적으로 여행할 수 있는 위치다. 한국 학생들은 IT 강국 대학생들답게 잘도 검색해서 돌아다녔다.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야 뻔한데, 항공편과 숙소를 저렴하게 예약하는 방법에 다들 귀재였다. 훨씬 오래 머물고 있던 내가 정보를 얻어야 할 판이었다. 영국이나 폴란드는 몇 번씩 다니고, 서너 명이 모여서 아이슬란드 일주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2017년 봄학기 학생들은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선 덕분에 해외 부재자로 투표하는 경험까지 할 수 있다며 들뜨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에는 대사관이 없어서 다른 유럽 국가로 가야 했는데, 학생들에게는 그게 더 신나는 일이었다. 여행에 '투표하러 먼 길 간다'는 낭만적인 느낌이 보태져, 상트 페테르부르크부터 바르셀로나까지, 또는 민주주의 발상지인 아테네를 가서 하면 어떻겠냐는 등 아이디어가 줄을 이었다. 

빌뉴스 성 안나 성당과 프란치스코 수도원

'헬조선'에서 자칭 타칭 'N포 세대'라 하는 힘든 청춘들이다. 이렇게 나와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학생들의 모습은 도전적이고,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모습을 한국에서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게 우리나라의 희망이고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제 한국 가면 끝이라며 '취준생 라이프' 돌입 전에 마지막으로 대학생활 한번 즐겨보는 거라는 절박한 심정을 하소연했다. 한국 돌아가면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온 학생도 있었다. 드문 경우지만 다시 되돌아 나오는 학생도 있다.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또는 한국이 너무 숨 막혀서, 전공을 바꾸거나 석사 진학을 하는 방식으로 돌아온 경우를 서넛 보았다. 교환학생을 연장하거나, 심지어 휴학을 하고 'free mover(청강생)'로 등록해서 더 머무는 학생도 있었다. 비좁은 한국 내 경쟁에서 쉬어 가거나 이탈하는 선택은 이상하게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신에게 더 좋다고 생각되는 선택지를 발견하고 자기 책임 하에 실행하는 것이면 응원받아 마땅하다. 외줄 타기 경쟁보다 다양한 모험을 택하는 선택은 요즘 한국 학생들처럼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약간 발상의 전환만 하면 되는 일이다. 

5월 초 빌뉴스의 Open Kitchen 푸드트럭 행사

자신에게 더 좋을 수도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찾고, 적절한 방법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하기에 교환학생만큼 좋은 기회도 없어 보인다. 단기 여행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지만 한두 학기 체류하며 공부하고 살아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자기 실험이다. 그 자체가 긴 여행이기도 하다. 압축적으로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경험이 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보는 기회도 된다. 몇 년 새 교환학생이 많이 늘어났다지만, 생각 같아서는 대학 생활 중에 적어도 한 학기씩은 무조건 경험해보도록 했으면 좋겠다. 유럽 내(몇몇 역외 국가 포함)에서는 에라스무스(Erasmus)라 불리는 교환 프로그램이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다. 폭넓은 장학제도를 포함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낙후한 나라 학생들이 더 잘 활용하는 교환 제도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진도 교환으로 오간다. 모두가 이용하지는 않지만 정말 많은 학생이 한 번 이상 유럽 내 다른 나라에서 수업 들으며 체류하는 경험을 갖는다. 역내 국가 간 민간교류를 촉진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동아시아와 유럽의 역내 질서가 얼마나 다른지 절감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가 간에 이런 프로그램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카우나스 기차 터널 근처 네무나스 강을 가로지르는 보행자 다리

국가 간 시스템까지 만들지 않더라도, 한국 내에서 학생들의 국제적 경험을 적극 지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재정적 형편에 큰 부담 느끼지 않고 다수가 향유할 수 있는 보편적 제도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세계 11위나 되는 부자나라인데 숫자도 줄어가는 학생들에게 그 정도 못해주나 싶다. 망상이지만, 고등학교 끝나고 대학 가기 전에 누구나 일 년쯤 국외에 나가 있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까지 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도 배웠는데 써보기도 할 겸, 세계여행이든 특정 국가 체류든, 세상이 넓고 할 게 많다는 것을 생각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대입이나 취업 레이스를 잠시 멈추고, 한국에서 그 좁은 경쟁을 꼭 통과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보게 하면 좋겠다. 한국이 예전처럼 고급인력 유출을 걱정하는 나라도 아니고, 역량이 되고 취향이 맞는다면 해외 취업은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거창한 정치경제적 이유를 찾지 않더라도, 일단 한국의 대학생활은 모두를 옥죄는 취업 전쟁터가 되어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태다.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이렇게 잠깐 나와서라도 숨 쉴 시간과 젊음을 즐길 기회를 확보해줄 필요가 있다. 

봄햇살이 따가웠던 카우나스 강변 공원 풍경. 리투아니아 유일의 터널 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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