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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19. 2018

시작: 33일 자동차 여행 계획하기

2018년 여름, 부모님과 딸의 중부 유럽 자동차 여행

지난 6월 초부터 7월 초까지, 33일간 부모님과 함께 중부 유럽을 누빈 자동차 여행을 끝냈다. 처음에는 여행하면서 매일 조금씩 기록을 남기고 감상을 덧붙여 생생한 여행일기를 써볼까 했다. 첫날부터 바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오롯이 접어두었다. 사십 대가 되어 체력이 떨어져서 쉽게 지친 탓도 있다. 이십 대였더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가이드 겸 운전사 겸 사진사를 하면서 밤마다 기록을 남길 체력적 정신적 여유는 없었을 게다. 짧게라도 써서 실시간으로 남기는 감상문도 흥미로울 것 같았으나, 과욕이었다. 천천히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느낌을 되살리는 여행기를 쓸까 한다. 며칠 새 어렴풋해진 기억을 끌어내 시작하려니 까마득하다. 33일 동안 구경한 게 이렇게 많다니, 틈틈이 쓰자면 133일쯤 걸릴 수도 있겠다.


올여름 33일간 부모님과의 중부 유럽 자동차 여행. 이 여행은 내가 조르다시피 제안한 거였다. 리투아니아에 장기 체류 중에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 여행 좋아하시는 부모님이 은퇴 후 시간 여유가 있으시고, 나도 객원교수로 있으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넘친다. 유럽의 기나긴 여름방학은 이런 거 한 번 안 하면 나쁜 딸이 될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부모님 두 분이서 곧잘 다니시지만 아무래도 해외여행 옵션은 전문 가이드가 이끄는 패키지다. 감사하게도 아직 체력이 충분하시니 가족끼리 이런 자유여행 한 번쯤 하면 좋겠다, 나도 여행은 거의 혼자 하니 모처럼 가족이 같이 다니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유럽은 자동차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명분을 붙이자면 아빠의 만 70세, 엄마의 건강 회복, 나의 만 40세 기념 여행으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작년 하반기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다. 부모님 항공권을 산 다음 렌트냐 리스냐, 호텔이냐 에어비앤비냐, 여기 가냐 저기 가냐 고민을 했다. 부모님도 유럽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주요 관광 대국들은 제외되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빼고 보니 치안 걱정은 한결 덜었다. 가고 싶은 곳들을 연결해 코스를 만들고 운전 시간을 고려해 일정을 만들었다. 숙소 예약하기, 도시별로 구경 순서 정하기, 주차시설 알아보기, 행사 여부나 휴무 체크 등은 어차피 다 내 몫이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숙소 한 곳 예약도 이것저것 비교하려면 시간이 상당히 든다. 이 시간과 노력만큼 연구를 했다면 책 한 권 쓰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40대에서 70대까지의 세 사람이 체력 보전하며 여행하려니 숙소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매일 짐을 풀고 싸는 것도 중노동이라 가급적 한 곳에 이틀씩 묵도록 신경 썼다. 셋 다 면허는 있지만 비상시가 아니면 내가 할 것이었으므로 하루 5시간 넘는 운전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전 구간 혼자 운전했는데, 아쉽게도 인증숏을 못 찍었으나 총 7천400킬로미터 정도다. 최종 계획안은 이랬다. 미리 모든 숙소를 예약했기에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돌아보니 별 탈 없이 진행된 것만도 정말 감사하다. 



오래 계획했지만 날짜가 다가오면서 걱정이 되었다. 가족이라지만 닮은 듯 전혀 다른 세 사람이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70대 전후의 부모님과 40대 딸이 33일간 여행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어렸을 적 따라다닌 여행과도 달랐고, 짧은 여행과도 달랐다. 한 달을 좁은 차, 좁은 숙소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내는 모험이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또래 친구들이 '왜 그런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반응과 함께 사지로 떠나보내는 표정으로 응원해주었다. 부모님과의 여행을 감행한 경험이 있는 또래일수록 경의와 우려를 표했다. 네 가족 완전체도 아니고 동생이 빠진 삼발이 구도였는데 이 또한 모험이었다. 


잘 갖추어진 패키지 해외여행에 익숙한 부모님에게 전문 가이드 없는 해외여행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나 역시 대부분 도시에 초행이었기에 가이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길게 떠나는 부모님과의 여행은 기적 같은 기회다. 다시없을 이벤트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사전에 조율하고 취향부터 생활 패턴까지 맞추려고 노력했다. 항공권이나 차량, 숙소 예약 같은 준비는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된다. 진짜 문제는 여행을 함께 즐길 몸과 마음의 준비였다. 아날로그 세대 부모님께 큰 지도와 가이드북을 사 드렸다. 스마트폰 속 실시간 여행 정보나 지도 검색 따위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엑셀로 만든 일정을 수시로 동생에게 보내서 프린트해 보여드리게 하고 의견을 물으며 수정했다. 


내 성격상 즉흥적인 변경이나 급변사태를 지극히 싫어한다.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이니 지나다가 멈추기도 하고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도 아빠는 갑작스럽게 큰 계획을 바꾸는 즉흥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컸다. 충돌하지 않으려면 미리 수차례 일정에 대한 다짐을 받아야 했다. 비용과 공간을 따져서 에어비앤비와 아파트형 숙소를 많이 잡았다. 식료품 사러 장도 봐야 하고 빨래도 하면서 살림을 병행해야 했다. 여기에 들이는 시간이나 노력에도 아빠와 엄마와 내 기준이 전혀 다를 위험이 있었다. 소소해 보이는 그런 부분에서 파탄이 나는 법이다. 지나고 보니 부모님이 많이 참고 무조건 그래 그러자 해 주셨다.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순탄하게 예정대로 잘 끝났는데, 결국 나 하자는 대로 맞춰주신 덕분이다. 많은 곳에서 구경 욕심을 억누르신 아빠와 이미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려 힘든 티 감추고 박자를 맞춰주신 엄마께 박수.


여행을 시작하고 마치는 기점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이었다. 공항에서 차로 출발하도록 6개월 전에 푸조의 '오픈 유럽(Open Europe)' 리스카를 신청했다. 20일 이상 자동차로 유럽 각국을 다닌다면 렌트보다 리스가 낫다는 조언을 들어서다. 두세 달 넘는 장기여행이면 가격 차이가 상당한 모양이다. 33일도 따져보니 웬만한 렌트보다 저렴했다. 새 차이고 보험이 완벽하게 커버된 점이 마음에 들었다. 푸조 차를 몰아본 적도 없고 성능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만족이다. 웨건형이라 트렁크도 넉넉해서 세 사람 짐에다 식수와 먹을거리를 잔뜩 싣고 다닐 수 있었다. 33일간 정든 파란 푸조 308W는 전혀 말썽 없이 든든한 발이 되어 주었다. 

푸조 리스카는 번호판이 빨간 색이라 좀 눈에 띈다.

비용을 간단히 기록했다. 항공료 제외 금액이다. 

리스카 1408유로 + 숙박 총 4114유로 + 각종 입장료 1905유로 

+ 교통비(주유, 주차, 비넷, 톨비) 1439유로 + 식사비(음료, 간식, 장보기 포함) 2999유로 + 기타 188유로 

= 총 12053유로, 한화로 약 1570만 원. 셋으로 나누면 일인당 약 524만 원.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숙소 비용이 덜 들었다.  교통비는 두 명 이상의 가족이라면 자동차 여행이 저렴한 듯하다. 물론 국가에 따라 다르고 기차나 대중교통에 할인폭이 큰 학생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자동차 덕분에 얻은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짐 걱정을 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비용 대비 효용은 매우 컸다. 대체로 비싼 국가와 도시들이어서 입장료가 상당했지만 전체 경비는 꽤 절약했다. 딱히 아껴 쓴 것도 아니고, 구경을 덜 한 것도 아니며, 호화판은 아니라도 전망 좋은 식당에서 잘 먹고 다녔다.  


준비 시작할 때는 자동차로 소풍 하듯 다니면서 여유를 즐기자는 결심을 했었다. 원래 우리 가족 여행 스타일은 유유자적과 거리가 멀다. '언제 또 오겠냐'는 정신으로 구석구석 열심히 돌아다니는 열렬한 구경꾼들이다. 이번만큼은 여유롭게 다니자며 구경 마니아의 대표 주자인 아빠에게도 계속 강조했다. 그런데 내 손으로 짠 일정은 결국, 역시,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엄지를 치켜들 만큼 숨 가빴다. 결국 하루만 묵는 곳도 꽤 있었고, 5시간 넘게 운전한 날도 꽤 된다. 세부적인 동선이나 운전 중간에 쉬는 시간을 꼼꼼하게 고려하지 않고 일정을 꽉 채웠던 것이다. 가는 곳이 너무 많기도 했고, 여행 전에 다른 일들을 해놓느라 다시 따져볼 시간이 없었다. 출발 직전까지 유명한 곳들만 겨우 체크했고, 세부 일정은 하루 전마다 다시 검색했다. 하루 전에 무리임을 깨닫고 포기한 곳들도 몇 군데 있다. 


어쨌든 경이로운 여정이었다. 오래 두고 기억하면서 더 풍성한 이야기가 될 압축적인 날들이다.  

형광펜으로 여행 경로를 따라 그은 아빠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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