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와아! 저에게서 여유를 보셨다니 신기해요! 음, 저는 여유롭다기보단 여유로운 사람이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저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여유라는 반증이지 않을까요.
맞아요. 영지님이 소개해 주신 <마음의 연대>의 문장처럼, 영지님이 친구와 나눈 대화처럼, 겉으론 달라 보여도 결국 우린 비슷한 것 같아요. 저도 영지님처럼 일정들을 꽉꽉 채우고 하나씩 해치워 나가는 생활에 강박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끔 동료들과(혹은 친구들과) 퇴근 후에(혹은 주말에) 뭘 하는지 얘기해 보면 저마다 일정이 있더라고요. (물론 이것도 코로나 이전의 모습이지만요.) 어떤 사람은 친구가 많아서 날마다 새로운 모임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악기를 배우고 수영 강습을 받고... 그런데 저는 별다른 취미도 없고 배우는 것도 없어서 거의 매일 집콕이었어요. 어느 요일에 만나자고 하건 저는 언제나 시간이 비어 있었고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참 싫었어요. 언제나 시간이 있다는 것. 언제나 여유가 있다는 것. 나만 너무 여백이 많은 것 같고, 나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했어요. 모두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며 살아가는데 저의 시간은 주인을 잘못 만나 소비당하는 것만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에너지를 불태우지 않는 제가 부끄러웠어요. 이대로 정체돼 오래된 퇴적물이 될 것만 같았어요.
뭐라도 해야 이 뒤처지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나도 “매주 O요일엔 일정이 있다” 하는 말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되는대로 휘젓고 다녔어요. 없던 약속도 만들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일부러 글쓰기 수업도 듣고요.
그런데 막상 숭숭 구멍이 나 있던 일정들이 빼곡히 채워지고 나니까 도무지 쉼이 없다고 느껴지는 거 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휘젓고 다녀놓고 정작 뭘 제대로 할 시간이 없다며, 피곤해 죽겠다며 징징대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청개구리 같을 수가 있나요.
애써 만든 바쁜 삶도 버거워질 무렵 생각했어요. 꼭 뭔가로 가득 채워야만 할까? 우리의 채움이 꼭 같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아주 단순하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이 이끄는 것으로만 채우면 안 될까? 이 사람이 이걸 하고, 저 사람이 저걸 한다고 나도 이것저것 죄다 들여놓을 게 아니라, 까다롭게 선별해서 내 일정을 채운다면? 보이기 위한 것들 말고, 나만을 위한, 정말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들로만 내 안을 채운다면?
저에게 최선이란, 꼭 풍선처럼 있는 대로 부풀어진 것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고르고 골라서 들여놓고 아낌없이 온 마음을 쏟는 최선이고 싶어요. 넓은데 얕기보다 좁아도 깊었으면 좋겠어요. 한정된 에너지를 아낌없이 불사르고, 일정 목표에 도달하면 그간의 노력과 성취감을 맘껏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유, 그런 마음의 공간을 열어두고 싶어요. 저는 사실은 감정이 여유로운 사람이고 싶어요.
영지님의 글을 읽고 우리도 <마음의 연대> 속 여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정이 빼곡해야만 비로소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 조금만 여유로워져도 외부로부터 비난받을 거라는 두려움. 이 또한 스스로를 향한 학대이자 비극적인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안타까운 현실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우리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아요. 내가 힘들다 싶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가도 힘들고, 내게 달콤한 건 다른 사람에게도 매혹적일 거예요. 그러니까 어쩌면 일정 도장 깨기 게임이 한창인 그들도 저처럼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자빠지고 싶은 심정일지 몰라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잖아요. 뱅뱅 돌리다 보면 언젠가 여유를 갈망할 거예요. 저는 전력을 다해 달리다 한껏 숨을 토해내는 여유 대신, 매일 조금씩 숨을 쉬며 전진하는 여유를 택한 거예요. 누구, 누구, 누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우린 결국 같아요. 그러니까 내 스타일대로, 내 속도대로, 내가 온전한 나일 수 있도록 애써 여유를 노력할래요.
-유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