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직종 '죽음설계사'
짧은 파마머리, 진한 다홍색 립스틱, 회색 체크 자켓에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
평범한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긴장한 듯 유리문을 열고 빼꼼히 사무실로 들어온다.
- 저, 명이 언니 소개로 왔는데요.
- 반갑습니다. 고객님. 이리로 앉으시구요. 차와 커피 중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데스크에 있던 세미 정장 차림의 여자가 손수 나와 능숙하게 안내한다. 준비된 미소지만 정말 환영하는 것처럼 환하게 반겨주니 어쩐지 긴장이 풀린다.
- 아.. 따뜻한 차로 할게요.
- 네, 그러면 방에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엉거주춤 3호라고 써진 방에 앉아 커다란 사무실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둘러본다. 널찍하고 탁 트여 있는 공간, 화이트톤 인테리어, 그리고 밝은 조명과 푸른 녹색식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어쩐지 피부과에 온 기분이랄까.
이곳은 '굿데쓰'라는 곳으로 서울에 벌써 2호점까지 낸 죽음 설계 사무소다. 명이 언니는 작년 10월 이곳에서 상담을 받고 올해 봄, 스위스의 어느 전원주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떠나기 전 언니는 내게 은근슬쩍 명함을 쥐어주며 생각 있으면 상담받아볼 것을 권유했다. 처음엔 한사코 싫었지만 한 달 전 치러진 언니의 장례식 다녀오고 나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언니는 영정사진에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액자가 넘치도록 밝게 웃고 있었다. 멋쟁이 선글라스로 머리를 넘기고 햇빛에 살짝 그을린 그녀는 도무지 죽으러 간 사람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는 것만 같아서 낯설었다. 사진 속 저 사람이 대체 어딜 봐서 난소암 말기냐구. 스스로도 어이없었지만 어쩐지 죽은 사람에게 질투가 났다.
완치하면 같이 꽃구경 가자면서, 나만 남겨두고 그렇게 혼자만 멋있게 죽기 있니.
- 안녕하세요. 설계사 '박지은'입니다. 비도 오는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생각에 빠져있던 찰나,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나타난 설계사가 말을 붙였다. 언뜻 봐도 첫째 딸보다 겨우 몇 살 위일 것 같은데. 우리 딸 뻘의 여자 설계사라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 네, 안녕하세요. 택시 타서 괜찮았어요.
- 김명이 고객님 지인분이라고 하셨죠? 잠시 따뜻한 차 마시면서 앞에 있는 설문지 작성 부탁드려요.
설문지를 보니 내 스스로 죽음을 계획하러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기본적인 신상 정보 기입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희망하는 날짜'와 '희망 장소' 및 '동행인 여부' 등을 묻는 란이 나왔다. 세상 참 좋아졌네. 죽고 싶은 날짜에 편안히 죽을 수도 있고.
- 혹시 작성하시면서 궁금한 점은 언제든지 여쭤봐 주세요.
- 저기, 이 희망 장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
- 네. 먼저 국내/국외를 결정해주시면 돼요. 주로 프리미엄 여행코스까지 선택하신 분들이 국외를 선택하시구요. 주요 국가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미국 등이 준비돼있습니다. 혹시 여행코스를 안 하시더라도 국외의 경우 장례비용이나 조문객 경비 등으로 인해 추가금이 있어요. 국내, 국외 어느 쪽이든 저희 쪽 전담직원이 마지막을 동행하니 안전 문제는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계사는 잘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막힘없이 설명을 풀어냈다. 내 죽음을 원하는 대로 계획하는 데 당연히 꽤 큰 액수의 돈이 들어갈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옵션별로 붙는 금액에 문득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관에 가져가지도 못하는 돈을 이제와 몇 푼 아껴보자고 흥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 저도 명이 언니랑 똑같이 국외 프리미엄 여행 A코스로 할게요. 동행인은 우리 첫째 딸로요.
설계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두꺼운 파일집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눈부신 설경을 자랑하는 스위스의 명소들이 눈앞에 주르륵 쏟아지며 각종 여행코스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있다.
- 여기 있는 추천 코스 중에 고르시면 되는데요. 이 사이에 따님과 자유여행을 추가하실 수도 있어요. 김명이 고객님은 알프스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1번 코스로 고르셨어요. 마지막도 체르마트에서 보내셨는데 굉장히 마음에 드셨던 것 같더라구요. 코스를 고르시면 자세한 여행플랜은 옆 사무실에서 직원이 도와드릴 거예요.
체르마트. 사진을 보니 아름다운 산호 색깔의 호수를 푸른 녹음이 감싸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그곳에서 언니가 마지막을 보냈구나. 병원에서만 본 언니는 늘 항암으로 온몸이 지쳐있었다. 물론 나 또한 팔자 좋은 여행 소리를 할 기력 따위 없었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 언니가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었는지.
- 오늘 상담 정리해드려도 될까요?
- 네. 뭐가 많긴 많네요.
-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고객님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정하는 거잖아요. 꼼꼼히 계획해야죠.
자, 고객님께서는 국외 프리미엄 여행 A코스로 하셨구요. 국가는 스위스, 동행인은 첫째 따님, 여행 기간은 약 한 달 맞으시죠? 6월 1일에 출국하셔서 희망 날짜인 2020년 6월 28일까지 인 걸로. 따님분 출국은 아마 하루 뒤가 될 거예요. 따로 희망하시는 날짜가 있으면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6월 28일은 엄마 기일이다. 그때 꼭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주면 좋을 텐데. 매일 외롭게 제사상만 차리던 날인데 드디어 나도 엄마를 따라갈 수 있겠네.
장례는 그곳에서 화장 절차 도와드릴 거예요. 그 후 따님이 한국에 오셔서 수목장 하실 계획이라 하셨는데, 저희와 제휴된 상조회사 이용하시겠어요?
- 아뇨, 딸이 아는 곳이 있대서 그냥 맡기려구요.
- 네. 그럼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안내해드리고 약관에 서명하시는 일만 남았네요.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비가 그쳐있다. 모든 게 쓸려가고 남은 상쾌한 공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빗물로 반짝이는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과 거리의 간판들, 물방울이 알알이 맺힌 나뭇잎까지. 평생을 보던 풍경도 지금은 달리 보인다.
누가 인생은 여행이라 했던가. 갑작스러운 폭우에 허무하게 취소해버리는 여행처럼 인생을 마무리하기는 싫었다. 언제 실려갈지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조마조마하게 사는 것도, 호스피스 병동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마냥 기다리는 것도 나다운 마무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오늘 내 죽음을 계획하고 왔다.
정해놓은 날짜에 준비된 모습으로, 딸과 보낸 즐거운 여행을 기억하며 눈부시게 눈감기로 했다.
저 멀리서 택시가 온다.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가 손을 뻗는다.
2020.4.19. 오늘의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