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작가가 바람에 대처하는 법

그땐 아주 이판사판인거야

by 김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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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적한 주택가

고급스러운 주택의 2층 침실에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어떤 여인의 실루엣이 보인다. 차르르 내려오는 화이트 속 커튼이 바람에 이리저리 살랑일 때마다 언뜻언뜻 그녀의 모습이 비친다.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 가벼운 캐시미어 니트, 그리고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 먹지처럼 새까만 밤, 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그녀의 방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2. 명희의 방

단정하고 깔끔한 손이 바쁘게 노트북 위를 오간다. 분위기 있는 가을색으로 네일아트 받은 손톱을 자랑이라도 하듯 분주하게 자판 이곳저곳을 누비며 타이핑 중인 그녀. 큐티클 하나 없이 관리받은 완벽한 손의 주인공은 자타공인 최고의 드라마 작가 '박명희'다. 현재 그녀는 종편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내 이름은 백여시> 12화를 집필 중이다.


3. 내 이름은 백여시

이 드라마의 주요 스토리는 딸만 넷인 백씨 집안의 자매들이 동네 빵집 알바생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다. 요즘 보기 힘든 맑고 긍정적인 빵집 청년이 백씨 자매들과 제 각각의 사연으로 만나게 되어 그중 한 명과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는 이야기다. 최근 드라마 트렌드에 맞게 '남편 찾기, 아내 찾기'의 재미를 넣은 것은 물론이고 각각 개성이 남다른 자매들의 그를 꼬시기 위해 벌이는 피 터지는 사랑싸움은 치정극의 묘미까지 골고루 잡았다는 평을 들으며 시청률이 날로 고공 행진하고 있었다.


4. 청일점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매력적이어야 할 남자 주인공 역할은 30대 초반 A배우가 가져가게 됐다. 그는 뮤지컬계에서 마니아층을 갖고 꾸준히 활동해오던 인물이지만 아직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페이스라는 이유로 윗선에서 커트당할 뻔했다. 그러나 작가 박명희가 자유연기 영상을 보고 '인상 좋네' 한마디 던진 것으로 판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종편에서는 워낙 어렵게 모신 작가인지라 그녀의 패스를 받은 A는 단번에 남자 주인공을 꿰차게 되었다. 작가의 통찰력대로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와 순수한 청년 느낌의 호감형 외모를 아낌없이 발산하며 팬들을 끌어모았고 아직 극 초반임에도 CF스타의 반열에 들어섰다.


5. 아뿔싸

"애기야, 전화를 몇 번 했는데 이제 받아요?"

명희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댄다. 말투는 다정하지만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아 그게, 한참 촬영 중이라 그랬어요."

피시방 갔다 들킨 아들처럼 덜컥 겁을 먹고 둘러대는 이 남자.

"막내가 오늘 일찍 끝났다던데요?"

"어? 아니 그 뒤로 갑자기 추가 씬이 몇 개 더 생겨서"

"애기, 스탑. 거기 내 측근이 몇인데 지금 장난해요?"

명희의 살벌한 존댓말에 통화 저편은 양들의 침묵,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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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새드엔딩

잘 나가는 스타작가와 이제 막 인기의 단맛에 빠진 주연 배우가 눈이 맞았을 때 해피 엔딩의 확률은? 이건 뭐 거의 제로라 보면 된다. 처음엔 작가님 덕분이라고 꽃을 보내질 않나, 촬영만 끝나면 달려와 작품 이야기를 하자고 하질 않나, 자기가 쓴 대본 속 잘생기고 착한 남자 주인공이 그러는데 제 아무리 높은 스타 작가라고 맘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희와 그는 곧 사랑에 빠졌고 둘만의 달콤하고 짜릿한 비밀 연애가 시작됐다.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둘은 잘 통했고 평소에도 존댓말을 써가며 "애기, 촬영 화이팅!", "작가님, 촬영 끝나고 갈게요" 진부한 레퍼토리로 사랑을 키워 나가던 어느 날, 박작가는 남자의 바람을 눈치 챈다. 하나 둘 줄어가는 카톡과 못 받을 때가 잦아지는 통화, 그리고 결정적인 측근의 제보.

"걔, 백씨 집안 넷째 딸이랑 유독 촬영장에서 붙어 다니잖아"


7. 오뉴월에 내리는 서리

'가수는 자기 노래 제목 따라가고... 그럼 작가는?'

익숙한 제목이 순식간에 명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내 이름은 백여시>

설마 설마 그 백여시가 명희가 만든 귀엽고 맹랑한 넷째 딸을 연기하는 여배우 C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둘의 엘리베이터 신을 직접 두 손으로 쓴 명희로서는 기가 차고 코가 찰 노릇이었다.

고맙다, 보답하겠다, 작가님밖에 없다, 사랑한다 해놓고 뒤에서는 넷째딸이랑 놀아나며 나를 아주 갖고 놀았다 이거지. 심증으로 반신반의하며 믿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끝내 데스패치 기자에게 연락해본 결과 확신이 되자 명희는 오히려 소름 돋도록 차가워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지. 그녀는 곧바로 다시 핸드폰을 열어 A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바닥으로 끄집어 내리는지 똑똑히 대본으로 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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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피 튀기는 복수혈전

바람이 일렁이는 창문 곁에서 꼿꼿하게 앉아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명희.

스산한 바람이 어디선가 흘러와 질투에 눈이 먼 여인 주위를 맴돌다 간다.

그래, 일단 너부터 손을 좀 보자. 이제부터 우리 드라마의 정체성은 '아내 찾기'가 아니라 '백씨 자매들의 복수 혈전'이 될 거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가난한 빵집 알바생이었던 남주를 갓난쟁이 아기를 두고 도망간 돌싱남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까짓 과거 덧붙이는 게 대수니? 피식 웃으며 자판이 떨어져 나갈세라 대본을 이어 쓰는 그녀. 백씨 집안의 장녀 '백자영'이 그 사실을 알고 남자의 전부인을 찾아갔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그 남자, 뺑소니 전과까지 있어요."

곧 자매들 모두 알바생의 '애 버리고 도망간 돌싱X뺑소니'라는 화려한 스펙을 공유한다. 이 와중에 오로지 넷. 째. 딸만이 사랑으로 이겨내 보겠노라며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고 맘고생 몸고생은 있는 대로 절절하게 겪은 뒤 이혼하는 걸로.

뭐, 넷째딸. 너도 내 작품에서 고생 좀 하며 연기 배워가면 좋지 않겠니?

그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온 막내를 번듯한 제 짝 찾아 시집간 언니들이 따뜻하게 감싸주며 백씨네 집안 이야기 종료. 박 작가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9. 막장드라마의 묘미

갑자기 남주가 개차반이 되자 피디도, 시청자도 어이없어 게시판은 악플로 도배됐고 항의 전화가 하루에도 수백 통씩 왔다. 오직 50대 주부들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반한 얼굴로 여자 넷을 오락가락할 때부터 난 알아봤지. 뒤가 드러울 것 같았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의 진정한 묘미는 욕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항의하는 사람들 조차 맛깔난 대사와 자극적인 소재에 꼬박꼬박 금요일엔 티비를 켰다. 점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백씨네 딸내미들을 응원하는 댓글과 남배우에 대한 욕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박작가가 의도한 대로 '자매들의 우애와 복수'로 방향을 틀어 결국 종편 역사상 최고 시청률 30%를 찍고야 만다.


10. 시상식 날

<내 이름은 백여시>로 또 한 번 스스로를 뛰어넘은 이 시대의 스타작가 '박명희'. 그녀는 배우들보다 더 화려한 레드 드레스를 골라 드라마 시상식 자리에 올랐다. 번쩍이는 조명과 수상자를 찍는 수 십대의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 선 그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박작가가 입을 열었다.

"먼저 드라마를 사랑해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또 고생하신 스탭분들, 차 감독님에게도 이 영광을 돌리고 싶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래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진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물론이고 티비 앞에 앉아 있는 시청자들도 명희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하고 있다.

"제게 캐릭터에 버금가는 생생한 실제 모습으로 영감을 불어넣어준 A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다들 좋은 저녁 되세요!"

밝게 웃는 명희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곧바로 카메라는 앞에 앉아 있는 배우 A의 얼굴을 클로즈 샷 한다. 정장을 빼입고 앉아 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카메라를 향해 억지 웃음을 지어본다. 참, 끝까지 없어 보이게. 그녀는 피식 웃으며 양 쪽에서 에스코트를 받아 유유히 무대에서 사라진다.


2020.4.14. 오늘의 상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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