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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May 06. 2020

같이 울어드려요

세상에 필요한 또 하나의 서비스직


1.

8시 23분.

창문을 힐끗 보니 바깥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회사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야경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화려한 도시의 빛들이 까만 밤을 밝히고 있지만 나에게는 닿을 수 없는 먼 곳 같다. 괜히 씁쓸한 마음에 중얼거려본다.

쟤들도 나처럼 퇴근을 못하네.


2.

눈부신 어둠이 가라앉은 대도시를 맨 얼굴의 여자가 아득히 바라본다.

낮에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점점 나오려고 한다. 다른 야근하는 직원의 눈에 띄지 않게 얼른 고개를 숙여 닦아낸다. 오늘은 좀처럼 그칠 줄은 모른다.

야, 나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터져 나오니.

업무용 가면을 써야 하는 회사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도 맘 편히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다. 오롯이 나의 슬픔을 위한 공간 있긴  걸까? 있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3.

12호실의 작은 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연 씨가 노란색 손수건에 코를 한가득 풀고 있다. 그 곁에는 50대 중반에 체크 스카프를 한 여인이 조용히 앉아있다.


4.

이곳은 합정역 근처에 있는 '티어셰어' 공간이다.

눈물을 공유하다는 의미를 담은 티어셰어는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메이트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어플로 예약해두면 가까운 거리의 지점에서 메이트와 만난다. "안전하게 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슬로건 아래 편안한 다과와 소파, 방음벽과 씨씨티비가 각 지점마다 갖추어져 있다.


5.

지연 씨는 오늘 함께 울어줄 메이트로 차여사님을 선택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몇 명의 다른 메이트들을 거쳤지만 계속 그녀의 따뜻한 위로와 침묵이 마음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지연 씨, 편하게 울어. 살아보니까 제때제때 울분을 안 풀어주면 다 속병 되더라."

차 여사님이 우는 지연 씨를 짠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수건을 건넨다.

"감사해요. 그동안 저... 진짜... 그동안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거든요. 근데 아무한테도 말할 데가 없는 거예요"

지연 씨가 말끝을 흐리며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래. 오늘만큼은 나한테 마음껏 말하고 풀어요. 내가 이 나이에 지연 씨 얘길 어디 가서 하겠어."

 주름진 손이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지연 씨 참 좋은 사람이야. 그걸 잊으면 안 돼."

푸근한 차여사님의 말 한마디에 지연 씨가 안겨 통곡한다. 두꺼운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6.

시간이 지나 어느덧 지연 씨의 퉁퉁 부은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군데군데 말라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두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정말."

"에유, 별소리를. 나야말로 다시 만나서 참 반갑기도 하고.. 내 딸 생각나고 그러더라"

"저.. 실례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우는 사람 곁에 있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하하. 이제 기운이 좀 났나 보다, 지연 씨? 그러게. 끝나면 나도 온몸에 힘이 쭉 빠지긴 해"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이상한 게, 처음엔 나도 막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할 것 같았는데 (웃음) 당장 곁에 사람이 우니까 그저 안쓰럽고 달래주고만 싶드라구. 그 누가 말했더라...? 기억력 좀 봐. 아무튼 옛말에 측은지심이 그런 건가 싶어"

"여사님 너무 따뜻하세요. 그래서 가끔 저도 모르게 엄마한테 말 못 할 얘기까지 나오나 봐요."

"나도 그래. 위로해주고 싶어서 하나 둘 말을 건네다 보면 딸한테도 못했던 내 이야기가 나와. 근데 그게 참 좋더라."


7.

10시 40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연 씨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밤하늘을 쳐다본다. 깊은 호수처럼 차올라 한계에 다다랐던 슬픔의 수위가 낮아진 기분이다. 밤공기가 얼굴을 감싼다. 뚜벅뚜벅 걸어가며 여사님과 나눴던 대화를 혼자서 곱씹어본다. 온종일 굳어있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린다.


8.

12시 20분.

지연 씨가 잠자리에 들기 전, 어플에 들어가 후기를 남긴다.

"차여사님 최고.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겨 운 기분. 덕분에 오늘도 잘 울었습니다."


.

.

우리 모두 잘 울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2020.5.6. 오늘의 상상 끝.



*본 상상은 심리상담가 정혜신 씨가 만든 치유공간 <이웃>을 떠올리며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철저한 방음벽을 만드셨다는 인터뷰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울고 싶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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