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머리의 여행자

이렇게 늙고 싶습니다.

by Ken

세월이란 참 조용한 화가입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머리칼이 하얀 눈처럼 물들어가고, 그 은빛 결을 뒤로 어루만지는 손길 속에서 나는 시간의 서정시를 읽습니다. 그렇게 단정히 빗겨진 머릿결 사이로, 삶을 묵묵히 견뎌온 아름다운 서사가 햇살처럼 스며듭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강물처럼 흘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주름을 늙음이라 말하지만, 내 마음에는 오히려 시간이 새긴 시(詩), 살아낸 삶의 가장 아름다운 기록처럼 다가왔습니다. 마치 고목의 나이테처럼, 주름 하나마다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가을과 겨울의 추억이 그윽하게 숨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 눈에는 굵은 테의 안경이 포근히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물을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나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혹시 그는 세상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건 아닐까. 눈앞의 것 너머에 숨어 있는 진실과 사랑을 붙잡으려는, 그 간절한 갈망이 아닐까.

턱수염은 깔끔히 다듬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흐트러짐 속에서도 깊은 운치가 있었습니다. 정제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물처럼 스며나는 멋이었습니다. 그 무심한 수염조차도 세월이 건네준 소중한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손등은 유난히 정직했습니다. 핏줄이 푸르게 도드라지고, 힘줄이 대지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은 손. 그 손은 지금, 무언가를 종이에 정성스럽게 새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설레어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무엇을 적고 있을까? 지나온 날들의 아련한 이야기일까, 앞으로 걸어갈 길의 벅찬 다짐일까. 아니면 그저 순간에 피어오른 마음의 꽃을 그려내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을 쓰든, 그 손끝에는 한 편의 인생이라는 대서사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만은 눈물겹도록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의 옷차림은 담백했습니다. 무채색의 옷, 검소한 신발. 화려한 멋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맑은 소박함이 그를 달무리처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것이란 진리를, 그는 온 존재로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시간을 잊었습니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채화였습니다. 흔히 젊음의 특권이라 여기는 열정과 집중이, 오히려 그의 깊은 세월 속에서 더 온화하고 묵직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잠시의 촛불이 아니라, 오래도록 타올라온 화로의 따스한 온기였습니다.

그는 흰 백발의 여행자였습니다. 여행이라 해서 반드시 낯선 땅을 밟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는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여행처럼 걸어온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를 천천히 음미하며, 그때마다의 풍경과 사람과 이야기를 가슴 깊이 품어온 순례자. 그의 삶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끝나지 않은 아름다운 여행길 위에 있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는 문득 꿈꿔봅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고귀하게 늙고 싶다고. 세월 앞에 위축되지 않고, 흰 머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나의 영광이자 나의 훈장으로 떠받드는 사람. 화려하진 않아도 담담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

그를 바라보는 이 순간이 내게는 한 편의 시처럼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걸어가고 싶은 노년의 이상향을 미리 엿본 듯, 마음속 보물상자에 고이 간직해둡니다. 언젠가 내 머리에도 하얀 지혜가 꽃피는 날, 나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저토록 아름다운 여행자로 기억될 수 있기를, 별빛처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사진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