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네 살의 캔버스 앞에서 깨달은 것

by 미동


만 다섯 살을 앞둔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몸 만한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놓아주면 며칠이고 종종 그 앞에 모든 재료와 모든 색깔을 더해 캔버스를 채워간다. 선은 단숨에 그어지고, 색은 거침없이 번진다. 그리고 이건 이런 뜻이라고, 아직 쓰지 못하는 글자를 대신해 또박또박 설명한다. 종이 위에는 형태가 남고, 아이 안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나는 아이의 지금의 나이인 만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고 이 문장은 오랫동안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어디를 가던 ‚얘 미술 시켜야겠다 ‘는 말을 듣다가 미대를 가고 조각가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사실 대상을 정확히 옮기는 능력이었고, 어긋남을 빠르게 감지하는 눈이었으며, 비례와 명암을 설득력 있게 조직하는 손이었다. 나는 점점 더 실제에 가까워졌고 닮아가는 만큼 인정도 따라왔다. 그리고 깊이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이 더해져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질문이 생겼다. 나는 대상을 얼마나 닮게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했지,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는 예술은 사실 닮게 그리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렇게 생겼다고 배워온 질서가 무의식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의 종이 위에는 아직 질서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중요한 것이 먼저 등장한다. 아이에게 지금 중요한 것이 농장 위의 트랙터가 아니라, 그 존재를 아끼는 감각이라면, 그것은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다른 장면을 본다. 아이는 평가받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린다. 결과보다 행위가 먼저이고, 완성보다 몰입이 앞선다. 종이 위의 선은 아직 경쟁하지 않는다. 설명을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그 앞에서 절대로 고치지 않기로 한다. 네 다리를 가르쳐주지 않고, 하늘의 색을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말을 듣는다. 이 선은 무엇을 뜻하는지, 왜 여기에 이런 점이 찍혀 있는지. 듣는다는 것은 판단을 유예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유예 속에서 아이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에서야 그림을 다시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닮게 그리는 법이 아니라, 열어 두는 법을, 형태를 정확히 세우는 기술이 아니라, 의미가 자라도록 기다리는 태도를. 네 살의 말은 일곱 개의 다리로도 충분히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단지 육아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전환이기도 하다. 아이가 지금 보는 세계는 하나의 정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아이의 시선 안에서 매번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나의 아이를 통해 본다.


나의 능력인 재현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방식이고, 아이의 능력인 표현은 세계를 열어 두는 방식이다. 이 어린아이의 그림은 아직 세계를 닫지 않는다. 사물은 제자리에 묶여 있지 않고, 색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아이는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대신 자기 안에서 떠오른 감각을 종이 위에 놓는다. 그것은 틀린 그림이 아니라, 아직 굳지 않은 세계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누구보다 정확하게 만들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고 나의 이 능력이 해내는 것들을 사랑한다. 다만 이제는 정확함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어긋난 선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제자리를 벗어난 색이 더 깊은 감각을 드러낸다는 것을 안다. 아이가 종이 앞에 앉아 아무 기준 없이 선을 긋는 그 시간은, 어쩌면 내가 오래전 지나쳐 온 자유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장면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켜볼 수는 있다. 그리고 지켜본다는 것은,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가 자라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지금 나에게 그림은 더 이상 닮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 모든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고 즐겁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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