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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Jul 25. 2017

반추동물

문학과 생각 조각들, 수필.

이상의 권태라는 수필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략하는 체해보임이리요?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중략)...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소는 반추동물이다. 한 번 먹은 음식을 다시 게워내서 씹어 소화한다. "되새김질"이라고도 하며, "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한다."는 관용적 의미도 이들의 행위에서 나왔다. 소나 양, 사슴 따위가 반추동물이며, 이들은 풀의 섬유질을 소화하기 위해 "반추위"에 있는 미생물의 도움을 받는다. 적당한 자신이 먹은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그들은 반추할 수밖에 없다. 미생물의 도움 없이 이들은 풀의 섬유질을 소화할 수 없다. 그들은 평생 반추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다.


이상이 반추동물의 생태를 포착하는 시선은 놀랍다. 한참 예전에 이외수 작가의 "감성사전"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작가에게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길게 적혀 있었다. 소가 반추하는 것을 보며 "그 시큼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봄이리요?" 같은 서술을 할 수 있으려면 갈고닦은 시선이 필요하다. 관점이 필요하다. 이상이 "권태"에서 포착해낸 "권태"의 양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참신하며, 정확하고도 신랄하다. 내가 "반추"라는 표현을 썩 좋아하게 된 것은 이상의 "권태"를 읽고 난 뒤부터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입이 없는 그런 기분을 어떻게 이렇게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상의 작품을 읽으며 혼란스러운 시절의 "경성"을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곤 했다. 그를 낳은 도시를 마음속으로 그렸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나는 요즘 참으로 반추동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끊임없이 과거를 곱씹으며 거기서 기쁨을 찾고 있다. 내 삶이 기쁘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그저 내가 무기력하게 우울의 굴레에 빠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삶마저 가정으로 나타내야 할 만큼 확실함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언제고 안 그랬던 건 아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이끌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반추와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상관은 있을 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몹시도 우유부단하고, 쉽게 울적해지며, 거기에 봄바람 꽃가루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움직이기보다는 회피하기를 바란다. 좋은 기억들로 벽을 둘러쌓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침전하며 나날들을 반추한다. 벽을 깰 방도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하다.


올해도 절반은 진작에 지났고, 달력은 연말을 향해서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나만 그저 이 4평짜리 자취방에 나를 스스로 가두고, 시간이 달리든 말든 상관없이 내 기억들을 후벼 파고 있다. 그때가 좋았지, 그런 태도로 말이다. 



Time is a valuable thing
Watch it fly by as the pendulum swings
Watch it count down to the end of the day
The clock ticks life away


"In the end", Linkin park



며칠 전, 체스터 베닝턴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수많은 삶의 굴곡을 이기며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컬로 있던 린킨 파크는 꼬꼬마 초등학생 시절 인상 깊게 봤던 "트랜스포머"의 OST "What i've done"으로 처음 만나, 난생처음 팝과 락 음악을 듣게 만들었던 그룹이다. 또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묘한 기분이 되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매체를 통해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접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언제나 믿기지 않는다. 


슬픈 기분이 들면 항상 다른 사람의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쩌면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라서 타인의 슬픔을 훔쳐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정법으로 쓰인 문장이 딱 내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특히나 반추를 몇 번이고 꾸역꾸역 반복하게 되는 새벽이면 더욱 간절히 그런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누군가 내가 콱 죽어버리길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조만간 그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반추동물이지도 않은 내가 부러 그들의 생태를 따라 하는 것은 퍽 좋지 않은 일이다.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일이다. 끊임없이 후회하고, 자학하고, 과거를 떠올리는 것. 내가 썼던 편지나 행복했던 순간들의 사진을 보는 것. 언제고 다시 돌아와 나를 괴롭힐 기억들을 부러 불러내는 것. 몇 시간이고 그렇게 방구석에 처밖혀 있는 것. 자기를 연민하는 것. 등등등. 가벼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나는 쉽사리 그만두지 못했다. 미련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사과하고 싶은 마음과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쪽으로든 잘 참고 있다. 


내가 몇 번이고 내 기억의 소화물을 끄집어 내도, 나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처박혀 있을수록 나는 내 삶을 영위하기 어려워 짐을 알고 있다. 조금씩 내 일상을 되찾고자 나는 노력하고 있다. 조바심이 나고, 걱정이 되고,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업보이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게 두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거창할 것 없는 삶과 존재에 지나친 행복이 깃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또 오밤중에 내 과거를 반추하며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름 문학을 향유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내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해도 이름난 작가들을 족적을 쫓기도 어려우리라. 그렇지만 나는 글쓰기에 내 구원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결국 글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얼마나 게으르고, 잘 쓰고,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내 느슨하고 질긴 삶처럼 내 글쓰기는 힘이 없고 비실비실하지만 언제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일이다. 여문 사람이 되고 싶다. 단단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라, 실하게 여물어서 오롯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상을 영위하는 여문 사람이 되고 싶다.


어쨌거나 별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타인의 슬픔을 관음 하며 우울한 기분에 푹 젖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겹지만 참으로 하릴없기도 하다. 밑바닥에서 기어 나와야 할 줄 알면서도 그 진창에 빠져 자신의 몸을 배설물로 뒤덮고 있는 꼬락서니다. 언젠가는 여기서 올라갈 것이라고 끊임없이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해야 하지 않을까? 그토록 겉돌았는데. 이제 빨래를 재깍재깍 하고 너는 사람이 되었으니, 다음엔 설거지를 재깍재깍 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다음은 일찍 일어나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런 별 볼일 없는 일들을 하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추동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여문 사람이 되고 싶다.


체스터 베닝턴을 떠올리며, 못난 과거를 떠올리며, "Breaking the habbit(https://youtu.be/v2H4l9RpkwM)"을 들으며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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