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이탈
"지금 당장 와서 보고해."
전화를 끊은 지 30분 후,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VVIP 별실. 서현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태블릿을 올려놓았다. 방 안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제사 음식 냄새와 고급 와인의 향기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놈의 정체가 뭐야." 강인혁(강태준)이 와인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의 눈에는 짜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서현이 태블릿 화면을 띄웠다. B1층 격리실의 CCTV 녹화 영상이었다.
"지난번 기억 전이 실험의 실패작, 실험체 B입니다." "아, 그 늙은 최 영감이랑 젊은 놈 기억이 섞여서 미쳐 날뛰던 놈?" 강인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 죽지 않았어?"
"죽었습니다. 분명히.." 서현이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의 실험체는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자신의 몸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두 개의 자아가 한 몸에서 충돌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놈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크허억...!" 극도의 흥분 상태를 견디지 못한 심장이 발작을 일으켰다. 기도가 막히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청색증이 나타났다.
털썩!
놈은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다가 곧 멈췄다. 의료진이 들어와 동공 반사와 심전도를 확인했다.
[오후 11:42 사망 확인. 사인: 급성 심정지 및 호흡부전]
"심장이 멈췄습니다. 육체는 멀쩡했지만, 자율신경계가 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셧다운 된 겁니다."
서현이 다음 영상을 틀었다. 시간은 오늘 새벽 3시. 영안실의 냉동고. 죽었던 시신의 가슴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쿵... 쿵...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심장이 멈췄다며."
"재부팅(Reboot)입니다." 서현이 설명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죽었겠지만, 놈의 몸 안에는 두 사람 분의 생명 에너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육체가 손상되어 죽은 게 아니라 스위치가 내려간 것뿐이라, 잔여 에너지가 강제로 시스템을 다시 켠 겁니다."
강인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 불사신이라도 됐다는 건가?"
"아닙니다. 지성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현이 탈출 영상을 보여주었다. 놈은 맨손으로 환기구 철망을 뜯어내고 짐승처럼 기어서 나갔다. "고위 인지 기능은 죽었고,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 남은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미친 괴물이 지금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는 거야?" "네. 현재 위치는 부산 기장군 철마면 야산. 도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잡아." 강인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경찰이나 언론에 노출되면 끝장이야. 죽은 놈이 걸어 다닌다는 게 알려지면 내 정체도 의심받아."
그는 옆에 서 있는 김 실장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김 실장. 처리반 데리고 가. 그리고 김 교수."
구석에 서 있던 김도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네? 회장님."
"자네도 따라가. 의료적인 처치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생포가 불가능하면..."
"현장에서 폐기 처분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새벽 5시. 기장군의 야산. 김도윤은 김 실장, 그리고 경호원 셋과 함께 산을 뒤지고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갈랐다.
"흔적이 있습니다." 김 실장이 바닥을 가리켰다. 진흙 위에 찍힌 맨발 자국.
김도윤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미쳤어... 죽었던 시체가 살아나서 도망이라니. 이게 다 내 업보인가.' 그는 품에 챙겨 온 고용량 마취총을 꽉 쥐었다.
"저쪽입니다!" 경호원이 외쳤다.
숲을 빠져나오자 민가가 드문드문 있는 국도가 나타났다. 가로등 아래, 누군가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환자복 차림의 실험체였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방향으로만 걷고 있었다.
"확보해." 김 실장의 신호에 경호원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거기 멈춰!" 경호원이 전기 충격기를 꺼내 들었다.
그 소리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도윤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눈동자. 그곳엔 더 이상 70대 노인의 흐릿한 눈빛이 없었다. 오직 '살고 싶다'는 광기에 찬 20대 청년의 눈빛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집... 가야 돼..." 남자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 거야... 난 아직 젊어... 죽기 싫어..."
그는 김도윤 일행을 보자마자 짐승처럼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막아!" 김 실장이 소리쳤다. 경호원 둘이 달려들어 남자의 팔을 꺾었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생명 에너지가 폭주하고 있는 탓이었다.
"크아아악!" 남자가 경호원 한 명을 종잇장처럼 집어 던졌다.
"비켜요!" 김도윤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안정시키고 마취총을 조준해서 쐈다.
마취 바늘이 남자의 허벅지에 꽂혔다. 코끼리도 쓰러뜨릴 수 있는 용량이었다. 남자가 움찔했다.
"으으... 으..." 약효가 돌기 시작했는지, 남자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는 풀린 눈으로 김도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김도윤은 보았다. 남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그것은 노인의 눈물이 아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빼앗겼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억지로 돌아온 청년의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살려... 줘..." 남자가 김도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죽기 싫어... 나 좀 살려줘..."
털썩.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김 실장이 다가와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확보 완료. 차 대기시켜."
경호원들이 쓰러진 남자를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김도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협박에 못 이겨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 조금씩 강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멀리서 붉은 동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