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상주
해온 바이오 그룹 강태준 회장의 부고는 대한민국 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향년 55세. 한창 그룹을 이끌어갈 나이의 젊은 총수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는 소식에 주가는 폭락했고, 호사가들은 온갖 음모론을 쏟아냈다.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대한민국 VVIP들이 모이는 특실은 조화로 가득 찼지만, 분위기는 벌집을 쑤신 듯 어수선했다.
"아니, 그 건강하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가다니 말이 돼?" "지병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더군." "자식도 없잖아. 그럼 경영권은 누구한테 가나? 전문 경영인?" "어제 긴급 이사회가 소집됐어. 유언장이 공개된다던데."
조문객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검은 세단 행렬이 장례식장 입구에 멈춰 섰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차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내렸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완벽한 핏의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 차가운 눈매. 낯설지만 어딘가 모르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그는 강태준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다. 대신, 영정 사진을 든 김 실장을 뒤따라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마치 자신이 이 장례식의 상주가 아니라, 지배자라는 듯이.
빈소 안 접객실. 그룹의 원로 임원들과 이사들이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네는 누군가? 우린 강 회장님 유언장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최 전무가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청년이 상석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았다. 그 오만방자한 태도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김 실장. 읽어 드려." 청년이 턱짓했다.
김 실장이 변호사와 함께 서류를 꺼냈다. "고 강태준 회장님의 유언장을 공개하겠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본인 강태준은 생전에 비밀리에 입양하여 후계자 수업을 시킨 양자, '강인혁'에게 그룹의 모든 경영권과 지분을 상속한다.]
"말도 안 돼! 양자라니? 우린 금시초문이야!" "회장님이 언제 입양을 했단 말이야?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검증도 안 된 애송이한테 회사를 넘겨?" 임원들이 고성을 지르며 반발했다. 강 회장이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승계 작업이 전혀 안 되어 있다고 믿는 하이에나들이었다.
그때였다. 청년, 아니 강인혁이 찻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강인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장 시끄럽게 떠들던 최 전무 앞으로 다가갔다.
"최달수 전무." 강인혁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년에 베트남 공장 부지 매입하면서 뒷돈 30억 챙긴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머, 뭐...?" 최 전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건 죽은 강 회장과 본인만 아는 비밀 장부의 내용이었다.
강인혁은 시선을 돌려 다른 이사를 쳐다봤다. "박 상무. 자네는 내연녀한테 법인 카드로 오피스텔 얻어준 거, 사모님이 아시면 곤란하겠지?"
그는 임원들 한 명 한 명을 지목하며 그들의 치부를 줄줄이 읊었다. 보고서도 없이, 마치 머릿속에 엑셀 파일이 들어있는 것처럼 정확했다.
"내가 애송이로 보이나?" 강인혁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영정 사진 속 강태준의 미소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회... 회장님?" 누군가 헛것을 본 듯 중얼거렸다.
"장례식 끝나고 싹 다 갈아엎을 거니까 입 다물고 조문이나 받아. 알겠나?"
좌중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전자는 달라도,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정보력은 의심할 여지 없는 강태준 본인이었다.
장례식이 끝난 밤. 텅 빈 빈소에는 강인혁과 김 실장만 남았다.
"처리했나?" 강인혁이 넥타이를 풀며 물었다.
"네. 회장님이 입으신 그 육체의 원래 신원... '이민우'의 가족관계를 파악했습니다." 김 실장이 보고했다. "홀어머니는 지방 요양병원에 계시고,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있어서 오빠의 행방을 찾을 여력은 없어 보입니다."
"다행이군. 하지만 불씨는 남겨두면 안 되지." 강인혁이 영정 사진 속 55세의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일찍 간 것 같지만, 사실 20년을 더 산 것이었다.
"빚 다 갚아줘. 그리고 넉넉하게 챙겨서 필리핀이나 베트남 쪽으로 이민 보내." "알겠습니다." "단."
강인혁의 눈빛이 번뜩였다. "만약 내 얼굴을 보고 아는 척을 하거나, 귀국하려 들면..."
그는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가족 상봉 시켜드려. 저세상에서."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인혁은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젊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완벽했다. 법적인 신분, 압도적인 공포, 그리고 걸림돌 제거까지. 이제 이 젊은 육체로 세상의 모든 시간을 집어삼키는 일만 남았다.
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현이었다.
"회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화기 너머 서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무슨 일이야? 내 몸에 이상이라도 있나?" "아뇨. 회장님 몸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서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충격적인 보고를 했다.
"오늘 아침, 병원 영안실 시신 한 구가 사라졌습니다." "시신? 누가 훔쳐 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CCTV를 확인했는데..." 서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신이... 제 발로 걸어서 나갔습니다."
강인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실험했던 '리필'의 부작용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기술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