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름 | 런던맑음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 있다.
단 한 번 마주했을 뿐인데 선명히 기억에 새겨져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런 풍경. 지치고 힘들 때마다 조용히 위안을 전하는 그런 풍경이 내게도 있다.
런던에서 두 시간. 브라이튼과 이스트본 사이에 자리 잡은 세븐시스터즈파크(Seven Sisters Park)가 그곳이다. 내가 아는 모든 장소 중에 감동적인 풍경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일곱 개의 하얀 석회절벽이 파도가 치듯 끝도 없이 이어져서 '일곱 자매 공원'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었지만, 공원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거대한 대자연.
2006년, 처음 그 담대한 풍경을 맞닥뜨리곤 먹먹한 마음에 한참을 서성였다. 자연은 이토록 큰데, 난 너무 작게 느껴져서.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고민이 참 하찮게 느껴져서. 넌 젊다고 그러니 잠시 잊어도 좋다고,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석회절벽이 삶에 지친 26살의 청년에게 말하는 듯했다. 지나가보니 26살이 삶에 지칠 게 뭐가 있냐 싶지만 그땐 그랬다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더라.
혼자 자전거를 타고 눈발과 흙탕물을 헤치며 올라간 그 언덕이, 거기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바다와 까마득한 수평선이 계속 생각나더라. 눈도 녹지 않은 잔디에 앉아 식어빠진 샌드위치를 먹는데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혼자여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혼자 떠난 유럽여행의 마지막 코스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고, 이후 런던을 가는 모든 지인에게 침 튀기며 가보라고 추천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줄곧 몇 년을 그리워만 하다가 이렇게 다시 찾게 되었다.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정말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또 기억이 나는 장면 하나.
실컷 공원을 누비다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영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옆에 앉아계셨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할아버지가 심심했는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영국 특유의 악센트가 있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이다.
"자네는 어디서 왔나?"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그 먼데서 여기까지는 왜 왔어?"
"세븐시스터즈파크를 보기 위해 왔어요."
"아 그래? 이 공원은 그럴만하지, 그럴만해~"
그렇게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다가 지긋한 눈빛으로 공원을 바라보시더라. 나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이제는 안녕을 고할 공원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마침 해가 지면서 뉘엿한 햇빛에 공원은 한결 더 빛이 났다. 이 마지막 순간이 더없이 황홀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기억 덕분에 내가 다시 찾아온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렇게 6년 만이다.
그땐 겨울이었고 지금은 여름. 그땐 혼자였지만 지금은 지인들과 함께. 나도 어느새 삼십 대이고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여긴 다행히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함이 참 어려운 세상인데도 말이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너무 조급하게만 살았나 보다.
조금만 지체돼도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강박관념과 함께.
30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살다 보니, 영어는 잘 늘지 않고 생각보다 심심하고 외롭긴 해도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천천히 그리고 뚜렷하게 흘러가고 있는 기분.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어느 때보다 그리워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 쉬었다 가자.
쉬다가, 놀다가, 웃다가 보면 근사한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