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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ug 19. 2016

#9.나의 공원, 세븐시스터즈파크

서른살 여름 | 런던맑음



#나의 공원, 세븐시스터즈파크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 있다.

단 한 번 마주했을 뿐인데 선명히 기억에 새겨져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런 풍경. 지치고 힘들 때마다 조용히 위안을 전하는 그런 풍경이 내게도 있다.


런던에서 두 시간. 브라이튼과 이스트본 사이에  자리 잡은 세븐시스터즈파크(Seven Sisters Park)가 그곳이다. 내가 아는 모든 장소 중에 감동적인 풍경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일곱 개의 하얀 석회절벽이 파도가 치듯 끝도 없이 이어져서 '일곱 자매 공원'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었지만, 공원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거대한 대자연.




보기만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 Seven Sisters Park(2006)




2006년, 처음 그 담대한 풍경을 맞닥뜨리곤 먹먹한 마음에 한참을 서성였다. 자연은 이토록 큰데, 난 너무 작게 느껴져서.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고민이 참 하찮게 느껴져서. 넌 젊다고 그러니 잠시 잊어도 좋다고,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석회절벽이 삶에 지친 26살의 청년에게 말하는 듯했다. 지나가보니 26살이 삶에 지칠 게 뭐가 있냐 싶지만 그땐 그랬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보자, 이 나무처럼 | Seven Sisters Park(2006)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더라.

혼자 자전거를 타고 눈발과 흙탕물을 헤치며 올라간 그 언덕이, 거기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바다와 까마득한 수평선이 계속 생각나더라. 눈도 녹지 않은 잔디에 앉아 식어빠진 샌드위치를 먹는데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혼자여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혼자 떠난 유럽여행의 마지막 코스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고, 이후 런던을 가는 모든 지인에게 침 튀기며 가보라고 추천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줄곧 몇 년을 그리워만 하다가 이렇게 다시 찾게 되었다.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정말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세븐시스터즈파크로 향하는 '바다, 인생, 중심' 버스정류장. 이보다 더 멋진 말이 있을까 | Brighton(2006)




오며가며 들른 브라이튼과 이스트본의 평온한 분위기도 기억에 남는다 | Eastbourne(2006)




놀라지말자, 여기서부터 보이는 모든 곳이 전부 공원이니까 | Seven Sisters Park(2006)




또 기억이 나는 장면 하나.

실컷 공원을 누비다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영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옆에 앉아계셨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할아버지가 심심했는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영국 특유의 악센트가 있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이다.


"자네는 어디서 왔나?"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그 먼데서 여기까지는 왜 왔어?"

"세븐시스터즈파크를 보기 위해 왔어요."

"아 그래? 이 공원은 그럴만하지, 그럴만해~"


그렇게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다가 지긋한 눈빛으로 공원을 바라보시더라. 나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이제는 안녕을 고할 공원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마침 해가 지면서 뉘엿한 햇빛에 공원은 한결 더 빛이 났다. 이 마지막 순간이 더없이 황홀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기억 덕분에 내가 다시 찾아온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가는 길은 아름답고, 오는 길은 아쉽더라 | Brighton(2006)








이렇게 6년 만이다.

그땐 겨울이었고 지금은 여름. 그땐 혼자였지만 지금은 지인들과 함께. 나도 어느새 삼십 대이고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여긴 다행히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함이 참 어려운 세상인데도 말이다.





여전한 나의 공원, 여전한 나의 감동 | Seven Sisters Park(2012)








#천천히 살기


그동안 몰랐었는데 너무 조급하게만 살았나 보다.

조금만 지체돼도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강박관념과 함께.


30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살다 보니, 영어는 잘 늘지 않고 생각보다 심심하고 외롭긴 해도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천천히 그리고 뚜렷하게 흘러가고 있는 기분.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어느 때보다 그리워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 쉬었다 가자.

쉬다가, 놀다가, 웃다가 보면 근사한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겠지.




그리울 순간, 그리울 풍경 | Regent Park,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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