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차 췌장암 환자입니다.

21년 5월의 어느 날

by 다정오

2021년 5월, 내 나이 서른이었을 때.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로 밥 벌어먹고 살다가 코로나 시점을 계기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무직 전향을 했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직원 복지로 무료 건강검진을 받게 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고, 태어나서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공짜로 건강검진을 받게 해 준대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에 반해 직원들은 공가로 하루 쉴 수 있다며 좋아했고 나도 그냥 하루 쉬는 것에 의미를 둬 옆 자리 직원 따라 어영부영 다음 주 월요일로 검진 예약을 잡았던 게 기억이 난다.


검진 날.

평소에도 퇴근 후 영화 한 편씩은 꼭 보고 잤던 영화중독자인지라 밤새 영화 '워크 투 리멤버'를 보다 늦잠을 잤고, 부랴부랴 일어나 양치질만 후딱 하고 나온 덕에 지각은 면했다.

가는 내내 스마트폰으로 영화 주인공들을 검색하고 리뷰를 보며 즐겁게 갔었는데.. 특히 아침 햇살이 5월답게 무척이나 따뜻했었고 붐비는 출근길이 아닌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분이 참 좋았었다. 잠시 후에 벌어질 일은 까맣게 모른 채로...


병원 도착 후 첫 순서였던 복부초음파 검사.

다소 어두운 검사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고 간호사가(의사는 아닌 것 같았음) 들어와 곧바로 의료기기를 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산부인과 검사처럼 이리저리 문지르는데 10초쯤 지났을까? 넉넉잡아 20초쯤.


"췌장에 혹이 있네요. 알고 있었어요?"

"......"


엥?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네?(웃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췌장에 혹이 있다고요?"


이 말을 뱉고 나서 심장이 매우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그냥 빨리 뛰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온몸이 쪼그라들면서 유일하게 심장만 세차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단 위 내시경이랑 나머지 예약하신 검사들 다 마치시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랑 얘기해 보세요."


그다음에 이어진 검사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것들을 완수했는지 여전히 기억에 없다.


드디어 진료실.

"복부초음파 결과, 췌장에 혹이 있어요. 사이즈가 작은 것 같지는 않아서 대학병원 가서 제대로 검사받으셔야 돼요."


여전히 실제 같지 않은 상황. 그래도 이것만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저, 죽는 거예요?"

"아직은 아무것도 몰라요. 가서 피검사, CT, MRI 같은 검사들 다 해본 뒤에야 수술을 하든 약물치료를 하든 결정할 수 있는 거라 우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에 가보세요."


이 와중에 또 튀어나온 눈치 없는 질문. 생존여부만큼이나 궁금하고 중요한 것.


"만약 수술받아야 하면 수술비는 어느 정도 해요? 많이 비싼가요?"


순간 의사가 날 한심하게 보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만약 검사결과가 수술을 해야 되는 걸로 나오면 수술비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해야 되는 거예요. 돈보다는 OOO님의 목숨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따끔히 혼 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돈보다는 내 목숨이 더 중요하지...'


의사가 발급해 준 진료의뢰서를 손에 들고 병원을 나서는데, 좀 전에 그 맑았던 날씨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굵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우산은커녕 가방조차 안 갖고 왔기에 달랑 진료의뢰서 한 장 손에 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가는 내내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빗물과 함께 콜라보된 나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한가로이 달리는 5호선 열차 안에서 나 혼자 다른 세상에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한 채로.. 주특기인 걱정 불안 모드 장착.

'나 진짜 죽나?'

'가족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만약 죽을병이면 너무 억울한데'


그래. 점점 더 선명해지는 나의 주된 감정선은 억울함이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게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게 많고, 내가 10대부터 앓아왔던 피부병 때문에 평범하고 자유로운 삶을 여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기엔 정말로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그리고 곧바로 덮쳐오는 또 다른 감정선, 걱정.


'아빠랑 언니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엄마.. 특히 엄마한테는 뭐라고 말해..?"

유일하게 같이 사는 식구인 엄마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기에 도저히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휴...


뭐든지 쉽지 않았던 내 인생의 또 다른 하드코어 미션이 시작된 그때 그날.

시간이 흘러 어언 2025년이 된 현재에도 그때를 복기니 여전히 아찔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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