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차 췌장암 환자입니다.

보호자 없음

by 다정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소화가 잘 안 됐다. 소화제를 먹을 정도까진 아니고 대체로 밥을 먹고 나면 더부룩한 기분이 오래간달까.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게 췌장에 문제가 있을 때 생기는 증상 중에 하나란다.

다시 봐도 참 어이가 없군..


일단 내가 가장 먼저 취한 액션은 보험 가입이었다.

그 흔한 실비 보험조차 없었기에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가족에게는 이 상황을 숨기고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까진 혼자 감당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병원비 같은 현실적인 부분 가장 고민됐는데, 역시 손해 볼 장사를 안 하는 보험 회사답게 애써 찾은 보험 상품에 가입하려 해도 몇 달간은 바로 보장받지 못하고, 이미 병 진단을 받았다면 그 병을 제외하고 가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다.

휴..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뭐라도 있는 게 낫겠지.

그나마 제일 저렴한 상품을 찾아 난생처음 보험 가입을 했다.


그다음 스텝으로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에 가기.


참.. 이것도 산 넘어 산이었다. 뭔 놈의 예약 전화 연결이 그리도 안 되는지. 하필 21년도에는 코로나가 극성이라 병원 예약 시스템이 순조롭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잡은 예약일.


회사에 연차 내고 혼자 버스 타서 도착한 OO병원. 아주 오래전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입원하셨을 때 왔던 병문안 이후 이곳에 제 발로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많은 사람들, 많은 환자들, 휠체어들, 시끄럽고 정신없는 배경 속에 묘하게 퍼져있는 공포와 긴장. 도무지 적응 안 되는 공간이었다.


우선, 접수창구로 가서 진료의뢰서를 제출하고 소화기내과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대충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가 제일 어렸다. 그리고 다들 보호자와 함께였다.

여러모로 민망하더군.

긴 대기 끝에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자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여니 나이 많은 의사 선생님이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맨 처음 건네신 말씀.


"췌장에 혹이 있네요. 이게 악성인지 양성인지 확인하려면 CT랑 내시경 초음파 검사를 해야 돼요"

다짜고짜 우르르 쏟아내시는 말씀들.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그냥 제일 단순하게 묻고 싶은 말을 물었다.


"췌장암인가요?"

"그건 아직 몰라요. 그런데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검사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죠."

"... 네."


진료 끝.

이때만 해도 대학병원 진료 분위기가 어떤지 몰랐다. 이토록 짧고 굵은 만남이라니.(나중에는 나 역시 스킬이 늘어 아예 질문리스트를 만들어갔다)


아무튼 이왕 온 거, CT든 내시경이든 다 하고 가고 싶었으나 이것도 예약을 해야 한단다. 무려 2주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이보다 더 대박이었던 건 역시나 비용.

내시경초음파 검사 하나가 무려 80만...

예상대로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 비싼 내시경초음파 검사조차 이미 예약이 꽉 차 2주 넘게 대기해야 한다기에 좀 더 저렴하고 빨리 할 수 있는 CT검사부터 예약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분명 아주 큰 사건이 생기긴 했는데 사건의 정체와 결말을 알 수 없는 그 예측 불가능함으로 인해 정말 미치도록 답답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현실이 날 더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다.


그래, 내가 선택한 길이지. 가족과 친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건 네 탓이기도 해.


다음 날부터 평상시와 똑같이 출근을 했고 남들에게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마음이 신호를 보냈다. 출근 후 책상에 앉아 5분쯤 지나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세수를 했다. 아직 암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닌데 혼자 영화 한 편 찍고 있는 내가 당황스러웠지만 이해는 됐다. 밤마다 잠은 안 오고 그럼에도 출근은 해야 되고 일도 해야 되고 그냥 모든 게 다 서러웠던 것 같다.


결국 나름 친하게 지내던 옆자리 직원에게 털어놓게 됐다. 사뭇 달라진 내 태도에 의아해져서 괜찮냐고 물어봐준 좋은 동료 OO 씨. 타인에게 처음 터놓은 것임에도 꽤나 의연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직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일 없을 거라며 쿨하게 위로해 줬다.

흠.. 막상 말해보니 별 게 아니었다.

진작 말할 걸 그랬나.

전부터 받고 있던 심리상담에서도 혼자 삭히지 말고 가족에게 꼭 말하면 좋겠다고 상담사가 조언해 줬다.

상담 끝나 갑자기 솟구치는 근거 없는 용기.

곧장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응? 우요아ㅓ어아"

"나 췌장에 혹이 있대."

"어어어 아시아우옹"


이런, 타이밍이 별로였다. 언니가 키즈카페에 있었다. 주변 소음 때문에 어렵게 꺼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덕분에 풀린 긴장.


" 나 췌 장 에 혹 있 대!!"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해주자 그제야 알아들은 언니.

웃픈 상황.


뭐, 어찌 됐든 드디어 나에게도 보호자가 생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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