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퇴근길을 걸어가는 '나의 소울메이트'가 봤으면 하는 글
살아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무엇인가가 되어간다.
깊어질 수 있다면 '무엇'이 되어도 좋다.
구본형 <나에게서 구하라> 中
이효리가 한끼줍쇼에 나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여자아이에게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SNS에 곧잘 회자된다. 강호동이 물어본다. "넌 커서 뭐가 될 거니?" 이경규가 가로채듯 대답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야지." 그랬더니 이효리가 이렇게 말한다. "뭘 누가 돼? 아무나 되지." 우린 살면서 지금까지 뭔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커 왔던 것 같다. 그런 것은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불린다. 그 장래 희망이란 게 돌이켜 보면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다. TV를 비롯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는 장래 희망, 즉 성공적 미래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어렸을 때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극초반만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시를 합격해 개천에서 용 나는 인물이 되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대중 매체와 그 매체들을 추종하던 어른들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그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수능을 너무 많이 보면서 시험 공부는 질렸고,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도 내가 수험생이 되지 않는 것까지는 용인해 주셨다. 다만 그 분들에게 차선책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바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4-5년간 학점관리를 할 것을 지시하셨고, 경제권이 없던 (과외를 하긴 하지만 용돈을 받는 처지인) 나는 그 분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능을 오래 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내 주요 대학에 들어간 만큼 충분히 예상되는 다음 코스를 밟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와는 달리 머리가 커졌다. 사회를 알게 되면서 과연 그 길만이 맞는 것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대안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가이드가 다시 한 번 옳은가? 라고 생각하며 대기업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정해진 틀이 있고 그 틀을 준수하는 와중에 결과까지 내야 하고, 강점 극대화보단 약점을 메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 회사에서 살아남는 길임을 알려주는 그 곳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2년 반이나 버텼던 것은, 회사 바깥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게 글쓰기였다. 정확히는 자기소개서를 도와주는 거였다. 입사를 앞두고 있는 이들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글쓰기를 이렇게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잘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퍼포먼스를 처음부터 비범하게 낸 것은 아니다(세상 일이란 게 그럴 수가 없다). 2년 반 동안 무수한 시행 착오를 거쳤고, 내가 글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사람들의 진심에 다가가는 글을 쓰기 위해 더욱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이 담기는 글의 퀄리티는 갈수록 나아졌다. 그렇게 나는 퇴사하고 글쟁이의 삶으로 들어왔고, 지금까지 글을 쓰며 밥 먹고 사는 중이다.
자소서를 쓰다 보면 참 많은 이들과 대화하게 된다. 그 친구들은 각자의 포부, 희망,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효용성이 떨어질 거라 지레짐작하며 그 본심을 고이 접어두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란 것이 내 뜻과는 무관하게 굴러가기도 했다. 사회와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내가 정말 순수할 때, 그려 왔던 '무엇'이 아닌 전혀 다른 '무엇'이 되어 간다. 어...어...어... 하면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다. 물론 나만의 무엇만을 고집하기에는 세상은 각박하다. 혹독한 세상을 내 고집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금수저 빼고는 쉽지 않다. 많이 추천하는 것은, 나처럼 중간 과정을 거치라는 것이다. 내 뜻을 잠시 뒤로 미뤄 두는 거지, 잊어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아무리 말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이미 세상과 타협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들이 대다수이다. 대다수가 추구하는 길이나 삶에서 아주 살짝만 벗어나도 그들은 나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낸다. 그 정도 눈초리에 주저하거나 좌절할 필요 없다. 눈초리에 굴복할 정도로 내 삶에 확신이 없다면, 그 확신은 가짜 확신이다. 그들은 나의 삶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만, 감이나 배를 사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무시해도 좋다. 대개 마음이 착한 아이들이 그런 그들의 비판어린 시선에 움츠러드는 경우가 많다. 오전에도 컨설팅을 한 친구에게 한 말이 있다.
스스로를 믿어라.
너는 지금까지의 삶을 다른 이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지게 살아왔고, 그 멋짐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내가 걷는 그 길이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고, 내 존재는 다른 존재로 대체가 어렵다고 굳게 믿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런 확신을 갖기 쉽지 않다. 좀 더 추천하는 것은, 딱 한두 가지로 압축하는 건 어떨까 싶다. 나 같은 경우는 읽었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에세이 류의 글을 정말 빨리 쓴다. 이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다른 누가 나한테 칼을 들이대도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이것도 3년여의 숙성 과정을 거쳐 나온 자신감이다. 그러나 너도 나도 다 자신만의 core value가 있다. 그리고 그 value를 열심히 갈고 닦으면 다 잘 될 수 있다. 어차피 잘 될 미래가 사람마다 시차가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하루를 최대한 성실하고 멋지게 보내면 그만이다. 설사 낮잠을 자더라도 괜찮다. 낮잠을 누구보다 열심히 자고, 그 잔 뒤의 시간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꽉 채워서! 보내면 되지 않는가? (이건 내가 낮잠을 오늘 많이 자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To. 이 글을 보며 퇴근하는 너
밖이 춥지만, 이 글을 보는 네가 이 글만으로 마음이 꽉 채워져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글 쓰는 게 일인 내가 고작 하는 게 이것 뿐이고, 이것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선택이,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이 누구보다 깊고 멋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2019년도 멋지게 수놓아질 것임은 당연하다고 확신하며 남은 2018년을 패기 있게 보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