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뷔통 재단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는 파리를 떠나는 날이었다.
도시는 언제나 떠나는 사람의 등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차에 올랐다. 시내를 빠져나오는 길, 콘크리트 빛 고가도로들이 서로의 어깨를 얹은 채 복잡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삶도 저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단정하게 뻗은 길은 드물고, 대부분은 겹치고 비켜가며 겨우 이어진다.
오늘의 목적지는 칼레였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나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파리 서쪽 숲 한가운데 자리한 루이뷔통 재단을 보고 떠나고 싶었다.
공원 속에 선 건물은 마치 바람을 품은 배 같았다. 유리로 된 돛이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설계자는 프랭크 게리.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 건물은 유연하고, 가벼웠다. 나는 그 곡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인생이 저렇게 휘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곧게 서려다 부러지는 대신, 바람을 따라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다면.
건물 앞 얕은 물 위에 유리가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늘 조금씩 흔들렸다. 물결이 일 때마다 형상은 흐트러졌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세계도 저렇지 않을까.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코 온전하게 붙잡히지 않는 것.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확함을 붙들려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마음의 온도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빛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벽과 천장, 바닥까지도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져 있었다. 건축은 작품과 함께 숨 쉬는 또 하나의 생명처럼 느껴졌다. 예술은 서로를 기대며 존재하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팝 아트가 걸려 있었다. 강렬한 색, 반복되는 이미지, 낯익은 얼굴들. 나는 문득 아서 단토의 말을 떠올렸다. 예술은 더 이상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던 그의 생각. 그리고 앤디 워홀의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이 왜 예술인가. 그 질문이 이미 예술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조금 겸손해진다. 예술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건넬 뿐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원색의 패널 앞에 서니 색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안았다. 세상은 늘 충돌 속에서 빛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부딪힐 때, 비로소 색이 생긴다.
그중에서도 내 발걸음을 오래 붙잡은 작품이 있었다. 투명한 실처럼 얽힌 구조가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선과 면이 겹쳐지며 시선을 흔들었다. 작가는 서도호. 그의 작업은 집과 기억,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없음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사라진 것을 잃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남아 우리 안을 떠돌고 있지 않은가. 노자의 무와 부처의 공이 멀리 있지 않았다. 텅 빈자리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피어난다.
전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예술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소비와 욕망, 반복되는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문득 백남준을 생각했다. 그는 화면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이어 붙였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를 건너는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는 이는 각자의 마음으로 그 의미를 완성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은 오래 머물렀다. 예술은 만남 속에서 비로소 살아났다. 작품과 내가 서로를 비추는 순간,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의미는 그 파문 속에서 태어났다.
다시 길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 파리의 마지막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 패널에 비치던 빛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에 따라 색을 바꾸던 그 표면처럼, 기억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파리를 품고 떠난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꺼내어 볼 때, 그 도시는 또 다른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예술은 여행의 쉼표 같았다.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게 하는 자리. 그러나 그 쉼표 덕분에 문장은 더 길어지고, 삶은 조금 더 깊어진다.
파리를 떠나는 길 위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장소는 마음 안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고, 오래도록 빛을 남긴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우리를 조금 더 낮고 단단하게 살아가게 할 뿐이다.
마음 안에 작은 방 하나 있을까요? 어떤 방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