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칼레의 밤

by 원성진 화가

파리에서 차를 몰고 나왔을 때,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루이뷔통 재단에서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다. 유리와 빛이 겹쳐진 그 건물 안에서 시간을 잊고 있었던 탓이다. 프랑스의 겨울 해는 친절하지 않다. 작별 인사도 짧다.

북쪽으로 달려 작은 마을 오픈 뉘르퀸(Ouve-Wirquin)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햇살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칼레 근처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칼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겨울이 오면 이곳은 세상의 가장자리처럼 느껴진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 태양은 존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휴지통 파일처럼 짧게 저장됐다가 금세 삭제된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마트에서 장을 본 뒤, 어두운 길을 운전해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가로등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은 분명 불고 있는데, 불빛은 고요하게 서 있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태도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소음은 줄어든다. 소음이 줄어들면, 생각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자극을 찾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자극이 사라질 때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 질문들을 피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인정했다.


십 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붓질은 점점 느려졌다. 게으름은 눈에 보이지 않게 쌓인다. 하루 분량의 타협이 쌓여 한 계절이 된다. 예술이 삶을 확장하는 일이라고 믿어왔는데, 어느새 나는 삶의 가장자리에서 생존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의 목표가 생존이라고 한다. 하지만 생존만으로 충분하다면 왜 우리는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그림을 그릴까. 생존은 바닥이다. 그 위에 무엇을 쌓느냐가 문제다.

그림을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사랑에는 비용이 따른다. 고통, 반복, 실패, 자기 의심. 나는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주장해 온 건 아닐까. 겨울밤은 변명에 친절하지 않다.


그때 정전이 일어났다. 집안은 완전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흥미롭게도, 나는 그 순간 더 또렷해졌다. 빛이 사라지자, 사물의 윤곽은 사라졌지만 생각의 윤곽은 선명해졌다.

정전은 일종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계획이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계획이 아니었던 것을 본다. 나는 전기 코드를 몇 개 뽑고, 차단기를 올렸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됐다. 인생의 문제는 종종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부하 상태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겨울은 밀도가 높은 고독 같다. 숨소리조차 선명하다. 그 밀도 속에서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밤은 점점 깊어졌다. 창밖은 잉크처럼 검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농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 타오르고 있었다. 불씨 같은 것. 오래 꺼진 줄 알았던 것.

멈춤은 압축이다. 다음 움직임을 위한 응축. 겨울의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이유는 더 깊이 뿌리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아침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빛이 오면 시작하겠다는 조건을 버리기로 했다. 조건이 사라질 때 선택은 더 또렷해진다.

나는 다시 붓을 들 것이다. 선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나의 좌표는 바꿀 수 있으니까.

겨울의 칼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하게 만든다. 생각 끝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결심이 태어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같이 붓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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